마녀의 눈으로 지금, 우리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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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눈으로 지금, 우리를 보다
  • 윤민 기자
  • 승인 202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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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마녀’를 다시 보는 이유

[뉴스피크] 

최근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마녀>를 다시 보았다. 별생각 없이 들린 서점에서 거친 듯이 유려하고, 그러면서도 박력 있는 그림과 분위기에 반해 가져와 그날 밤에 다 읽었던 만화였다.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마녀' 표지. [교보문고 갈무리]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마녀' 표지. [교보문고 갈무리]

가끔 그 안의 인상적인 장면이 생각나면 한 번씩 뒤적이며 그 여운을 즐겼지만 처음부터 다시 읽어본 건 참으로 오래전, 아마 사고 바로 읽고 나서 처음인 듯했다.  

2007년에 발간된(일본에서는 2004년, 일본 문화청미디어예술제 우수상 수상) <마녀>는 <리틀 포레스트>, <해수의 아이>(2009) 등과 같은 작품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초창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리틀 포레스트'. [인터넷 교보문고 갈무리]
▲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리틀 포레스트'. [인터넷 교보문고 갈무리]

특별히 어떤 한 작가에 대한 선호가 많지 않은 터라 작품 중심으로 만화를 보는 스타일인데, 책장을 넘기다 문득 이 만화를 다시 읽는 이유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처음 손을 당긴 것은 그림체였음이 분명하지만, 여전히 간직하고 다시 보는 건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같은 다른 매력이나 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사실 <마녀>는 제목 그대로 신비한 세계에 대한 상상력과 역사의 교차 속에 존재하는 마녀들을 그린 작품집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유럽의 전통적 미신에서 뾰족한 모자와 어두운 색의 옷이나 망투,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며 초자연적인 힘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존재가 바로 마녀(魔女, witch)이다. 그렇지만 만화 <마녀>는 그 존재를 이스탄불과 아마존, 오스트리아, 일본 등 전 세계로 넓혀나간다. 또한 고대 전설 속에서 등장할 듯한 마녀들이 현대와 현재 속에서 등장한다. 

 

▲ '마녀배달부 키키'의 포스터. ⓒ 뉴스피크
▲ '마녀배달부 키키'의 포스터. ⓒ 뉴스피크

그건 아마 마녀의 기원과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그 이름은 다르지만 마녀는 전 세계에 걸쳐 존재했고, 또 어쩌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마녀는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땅, 어느 문화에서도 전설과 신화처럼 이질적이면서도 신비한 ‘마녀’ 역시 함께 살아온 존재인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지식은 무한을 꿈꾸지만 항상 유한할 수밖에 없다. 지식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자연과 현상 그리고 존재를 무한에 기댄 상상으로 이해하고, 다독이던 게 바로 인간의 역사이자 문화사의 한 층위였다. 어쩌면 무지와 미지 사이의 영역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고, 가끔 과학으로 증명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나 현상의 인격체인 셈이다. 

다만 이런 미지와 무지에 대한 불편함을 두려움이나 공포로 이해되거나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마녀사냥’이 대표적이다. 중세 유럽뿐만 아니라 근대, 어쩌면 현대에까지 마녀사냥은 그 형태를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 만화 '베르세르크' 중 마녀사냥의 한 장면. ⓒ 뉴스피크
▲ 만화 '베르세르크' 중 마녀사냥의 한 장면. ⓒ 뉴스피크

그 처절함과 끝이 없을 듯한 증오와 무지는 만화 <베르세르크>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두려움의 존재였던 ‘마녀’의 이미지는 현대에 많이 바뀐 게 사실이다. 

마치 돌연변이처럼 등장하는 착한 마녀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마치 썰매 개를 끄는 또 다른 지역의 색다른 능력의 사람이나 부족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녀배달부 키키>로 정화되고, 어린이 동화 <마녀 위니> 시리즈로 좀 더 익숙해졌으며, 김다미 주연의 영화 <마녀> 등으로 인식이 다양해진 듯하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마녀를 생산하거나, 그걸 목격하고 있다. 다른 문화나 존재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나의 존재와 이득에 관한 가상의 적을 ‘마녀’로 만드는 일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대한민국에서는 ‘악마화’라는 수사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단지 의견이 다르고, 지향이 다르고, 자신과 충돌한다는 이유로 ‘악마’로 만들고, 가차 없이 폭로하고 협박하며 결국에는 처단하고자 한다. 

(물론 자신에 대한 공격의 방어로 그런 수사를 사용하기도 한다.) 

▲ '마녀' 1권, 1화 '스핀들' 중. ⓒ 뉴스피크
▲ '마녀' 1권, 1화 '스핀들' 중. ⓒ 뉴스피크

<마녀> 이야기의 처음(‘스핀들’)은 어찌보면 한 소녀의 복수에 관한 성장담이다. 

다른 종족, 다른 문화, 그리고 여자에 대한 편견은 어린 여자아이의 순정을 공개적이고 처참하게 짓밟아버린다. 어린 여자는 당연히 복수를 꿈꾸고, 놀라운 집념으로 세상 밖의 것이라 불리는 신비한 능력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그녀에게 상처를 줬던 모든 존재와 그 주변을 가혹하게 파괴하고자 한다. 

복수라는 건 당한 것을 되갚아 주는 것이다. 공감이 되는 복수는 그 방식의 정당성과 다르게 나름 응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복수나 증오와 같은 감정은 마치 암세포처럼 자기증식의 능력을 가진 듯하다. 내 감정과 일상을 잠식하고, 이후 세상의 관념과 기준마저도 자기의 감정에 종속시켜 버린다. 그걸 가끔 보상심리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한데, 결국 선을 넘고 자신을 넘고 세상의 기준을 넘어 버린다. 시골에서 올라온 소녀이자 전언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커다란 것이라 해도, 잃어버린 것을 대신할 수는 없는데….” 

“이 사람에게 들리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목소리. 이 사람에게 보이지 않았던 것은 진정한 자신의 마음 … 이 사람의 진정한 적은 자기 자신이었어요.” 

▲ '스핀들' 중, 이 사람은 굉장히 굶주렸던 거예요.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도 커서 마음에 뚫린 구멍을 다른 것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우리는 본인의 부족함이나 상실을 상대에 대한 증오로 채우고, 온라인의 무수한 매체를 통해 확대재생산을 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 뉴스피크
▲ '스핀들' 중, 이 사람은 굉장히 굶주렸던 거예요.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도 커서 마음에 뚫린 구멍을 다른 것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우리는 본인의 부족함이나 상실을 상대에 대한 증오로 채우고, 온라인의 무수한 매체를 통해 확대재생산을 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 뉴스피크

보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려 하는 마음은 자신을 결코 돌아보지 못하고 하고 모든 원인을 상대에게 넘기고, 그 상대를 ‘마녀’나 ‘악마’로 만들어 사냥하고자 하는 것이다. 

▲ 2화 '쿠아루푸' 중. 전쟁과 분열을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상대를 탓하는 순간 결국 끝나지 않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 뉴스피크
▲ 2화 '쿠아루푸' 중. 전쟁과 분열을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상대를 탓하는 순간 결국 끝나지 않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 뉴스피크

<마녀>의 두 번째 이야기인 ‘쿠아루푸’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마존 정글 속에서 변화와 현대화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방식과 존재를 외면하는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합리성과 경제성으로 포장한 차별과 선입견은 결국 어떤 이득을 위한 자기합리화가 되고, 거기서 벗어난 이들은 ‘마녀’로 공격받고, 씹어 먹힌다. 

외면은 배척이나 공격의 다른 모습이라는 말이다. 

▲ 2화 '쿠아루푸' 중. 인간은 보이지 않던 것,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는 것에 대한 태생적인 두려움이 있는 것일까? ⓒ 뉴스피크
▲ 2화 '쿠아루푸' 중. 인간은 보이지 않던 것,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는 것에 대한 태생적인 두려움이 있는 것일까? ⓒ 뉴스피크

결국 ‘마녀’란 우리가 보지 않음으로써 존재가 사라지거나, 의도된 모습으로 그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에게는 ‘마녀’의 존재 여부보다 ‘마녀’라는 존재, 자기의 적이나 ‘악마’라는 존재로 얻는 이득에 더욱 관심이 있는 것이다. 

‘마녀’를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마녀’를 외면하는 게 누구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솔직히 인정을 하면 어쩌면 새로운 세계로의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 

“아뇨, 꿈이라니. 무슨 말씀을요. 제게도 보였답니다. 새에 올라탄 마녀가요.” (3화 ‘새를 탄 마녀’ 중) 

▲ 3화 '새를 탄 마녀' 중.  ⓒ 뉴스피크
▲ 3화 '새를 탄 마녀' 중.  ⓒ 뉴스피크

일본 만화계가 주목하고 있는, 확고한 자기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인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최근 작품은 점점 일상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우연히 길에서 주운 새끼 고양이 카보챠와 시골생활을 시작한 작가의 자전적 애묘 라이프를 그린 에세이 만화로 2019년에 국내 출간된 <카보챠의 모험>. 사이좋은 남매가 이층침대를 통해 펼치는 상상의 나래를 아름다운 아동용 동화로 만든 <이층침대>(2025) 등이 그렇다. 

▲ '카보챠의 모험' 표지. ⓒ 뉴스피크
▲ '카보챠의 모험' 표지. ⓒ 뉴스피크

이는 어쩌면 우리, 평범한 이들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여정이 아닐까 싶다. 평범한 일상 속 신비한 즐거움과 힘, 그건 외면하거나 차별하거나 증오하지 않는 이해와 인정 속에서 가능한, 정말 소중한 것임을 새삼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 느끼고 있다. 다시 <마녀>를 찾아본 이유가 바로 그것인 듯하다. 

 

이 기사는 만화웹툰전문매체 위클리툰 weeklytoon.com에 함께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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