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이후의 부여를 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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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이후의 부여를 가다 1
  • 윤민 기자
  • 승인 2020.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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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스토리텔링 부여03] 무량사의 아득한 꿈 따라

[뉴스피크] 

부여가 간직한 백제의 정수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짧지 않은 여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부여가 단지 백제의 박물관이라고만 한다면 그 또한 부여의 다채로움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부여를 둘러싼 풍경 속에서 백제 이후의 부여를 만나본다.  

무량사 극락전. 가는 길이 단정하고, 외관은 수려하고, 내부는 시원하다.  ⓒ 뉴스피크
무량사 극락전. 가는 길이 단정하고, 외관은 수려하고, 내부는 시원하다. ⓒ 뉴스피크

꿈꾸는 풍경을 담다, 무량사

 

여행. 

그건 어쩌면 꿈을 찾는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꿈의 크기를 잴 수 있을까? 

그만큼 꿈은 너무도 사소하고도, 일시적이며, 제각각이기 때문에 무한하기 그지없다. 

그런 작지만 큰 꿈, 스스로 위로하면서 자위하는 꿈을 이리저리 재어 비워져 있던 공간을 채워나가는데, 채워졌다 느끼는 순간 또 새로운 꿈이 빈 공간을 지어내는 쳇바퀴 같은 윤회가 시작되는 법이다. 

그래서 마음은 늘 무언가를 갈망하게 된다. 

무량사의 입구와도 같은 산문. 시원하고 청량한 계곡과 함께 찾는 이를 반긴다.  ⓒ 뉴스피크
무량사의 입구와도 같은 산문. 시원하고 청량한 계곡과 함께 찾는 이를 반긴다. ⓒ 뉴스피크

그 꿈이 길이 바로 무량(無量)사로 이어진다. 

서울에서 부여로 들어오는 산문과도 같은 외산면에 꼭지점처럼 자리한 만수산 중턱 포근하게 안겨 한없이 꿈을 이어가고 있는 무량사이다. 

거대한 아미타 삼존불이 온갖 군상의 사소하고도, 궁상맞은 모습과 소망을 한없이 자애로이 모습으로 맞이하고, 다독거리는 곳이자, 외산면 바로 코앞에 있으면서도 특유의 고즈넉함과 균형감으로 북적이는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혀 주는 곳이기도 하다. 

조신시대를 대표하던 천재였던 김시습 또한 큰 좌절을 겪고 난 뒤 못다 이룬 꿈을 안고 이곳을 찾아 마음을 달래었다고 하니 꿈을 맡아 안아 주는 것뿐 아니라 못다 이룬 꿈에 지친 마음을 보듬어 주는 힘이 바로 이곳 풍경의 깊이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마치 무량의 세계로 우리를 들이는 것을 환영하듯 세워진 일주문은 오랜 세월 탓에 주름이 한 가득이지만 그야말로 곱게 나이 드신 어르신을 볼 때처럼 그 장중함과 정갈함으로 주위를 감싼다. 편액에 ‘만수산 무량사’라 크게 쓰인 글자 오른쪽 위로 눈에 띄는 자그마한 한반도 모형. 독특하다 생각하며 뒤로 돌아가 보니 같은 자리에 있는 같은 모형 안에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 새겨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라. 꿈과 염원을 지니고 이곳으로 찾아드는 사람들이 돌아가는 길에 얻어갔으면 하는 무량사의 마음이 담긴 듯한 이 글귀를 새기며 도량으로 향한다.  

무량사의 세 친구. 모두 귀한 신분이지만, 가장 단정한 모습으로 시선을 사라잡는다. ⓒ 뉴스피크
무량사의 세 친구. 모두 귀한 신분이지만, 가장 단정한 모습으로 시선을 사라잡는다. ⓒ 뉴스피크

아담한 계곡을 지나 녹음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천왕문 앞에 닿는다. 이 앞에 서니 네모난 문을 액자 삼아 부도와 탑, 극락전까지 한 줄로 쫙 늘어선다. 절묘하기 이를 데 없다. 너무 빈틈없이 맞춰 서서 좀 당황스러울 정도인 이 세 친구를 따라 나도 줄맞춰 천왕문을 지난다. 

안으로 들어서자 한 줄로 선 세 친구 양쪽으로 널따란 마당이 펼쳐진다. 일렬로 배치된 세 친구 덕에 너른 공간의 여유와 더불어 절의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와 포근한 안정감을 준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를 옆쪽으로 건물 몇 채는 나지막이 솟아오른 언덕 위에 자리해 있다. 언덕 아래로 소복이 피어난 들꽃과 우물이 소박하고도 편안한 여유를 선사한다. 오른쪽으론 종각과 커다란 느티나무가 무게감 있게 집을 지키고 있다. 

알고 보니 한 줄로 서서 나를 바라보던 세 친구는 모두 한 가닥 하는 친구들이었다. 석등이 보물 233호, 5층 석탑이 185호, 극락전이 356호로 셋 다 내로라하는 보물들이었던 것. 거기에 잠시나마 줄 좀 섰으니 내게도 보물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닿았으려나. 

꽃과 잘 어울리는 무량사 극락전. ⓒ 뉴스피크
꽃과 잘 어울리는 무량사 극락전. ⓒ 뉴스피크

극락전은 겉에서 보아도 그 규모가 남다른데, 안을 들여다보면 2층까지 뻥 뚫린 넓은 공간에 또 한 번 압도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중창하여 그런지 큰 시련을 겪은 후 새로운 희망을 담으려는 염원이 장중한 규모에서도 드러난다. 

이 넓고도 높은 웅장한 공간 안에 듬직한 세 사람이 앉아 들어오는 이를 반긴다. 슬쩍 보기엔 진중한 표정이지만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면 그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확인할 수 있다. 가운데 5.4미터의 아미타불이 양쪽에 황금 왕관을 쓴 그보다 조금 작은 두 보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과 함께하고 있다. 흙으로 빚어 만들어서 그런지 금동 불상보다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탁 트인 공간이 마음을 열게 하고 불상과 보살상들에 번지는 미소가 걱정을 물리치니, 이곳에 들어선 이들은 그들이 지닌 고통과 불안, 슬픔을 마음껏 쏟아내고 꿈을 빌며 안심하고 돌아섰으리라. 

이렇게 무량사의 중심을 이루는 셋을 차례로 만나보고 나면 길은 자연스럽게 언덕으로 이어진다. 건물이 가깝게 붙어 답답한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도 멀지 않아 오가기에 부담이 없는 거리는 이곳을 더욱 편안하게 느끼게 한다. 

 

못다 이룬 꿈이 아직 그 얼굴에 남아

 

언덕을 오르면 오른쪽으로는 계곡을 건너 삼신각이, 왼쪽으로 언덕을 더 오르면 영정각이 있다. 이 영정각 안에는 한 선비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웃지도,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짓지도 않은 그 선비의 얼굴은 조금은 침울하고 무언가를 아직 쫓는 듯 심각하다. 연갈색 비단에 검은 선과 검은 색채만이 담긴 흐릿한 얼굴이라 더욱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이 선비는 바로 당대를 호령했던 천재 김시습이다. 

영정각의 김시습.  ⓒ 뉴스피크
영정각의 김시습. ⓒ 뉴스피크

조선 중기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 초상화는 자신이 직접 그린 자화상이라고 전하는데, 사대부들의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렸던 화원 화가만이 그릴 수 있는 화법을 사용했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누군가가 그려주었을 가능성도 있는 듯하다. 송시열은 이 그림이 ‘수염을 기르되 승려의 옷을 입은 승려상’이라 했는데, 이 그림에선 사대부의 모자를 쓰고 있으니 누가 그렸든, 언제 그려졌든 나중에 사대부들이 그들의 시각에서 다시 그려낸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한다. 

 

김시습은 1435년(세종 17년)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났다는데, 세상에 나온 지 여덟 달만에 스스로 글을 읽었다고 한다. 즉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는 수준이기에 당시 외가집 할아버지뻘인 최치운이 그 천재성을 보고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주었다고 한다. 시습(時習)은 ‘배우면 익힌다’라는 뜻이다. 

3살 때 김시습은 맷돌 가는 걸 보고 시를 지었고, 5세에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통달했기에 신동이라고 널리 알려졌다. 소문을 듣고 당시 정승이던 허조가 찾아와 5살짜리 김시습에게 말했다.

 “네가 글 짓는 재주가 있다고 들었다. 이 늙은이를 위해 노(老)자를 넣은 시 한 구절만 지어 줄 수 있겠느냐?” 

김시습은 즉석에서 시를 지어 대꾸했다. 

“노목개화심부노(老木開花心不老)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만은 늙지 않았도다.” 

허조는 감탄했다. 급기야 하늘이 내린 신동에 대한 소문은 대궐에까지 알려졌다. 세종은 어린 김시습을 궁궐로 들여 승지를 시켜 여러 가지 시를 지어보게 했다. 

그러자 다섯 살 어린나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시를 지어냈다. 세종은 훗날 크게 중용할 것을 약속하고 비단 50필을 하사했다. 그리곤 비단 50필을 절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말고 가져가 보라고 했다. 그러자 김시습은 비단 필을 허리에 묶어 끌고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세종이 승하한 뒤 일어난 조정의 혼란은 그를 낙심하게 만들었다. 급기에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에 김시습은 목놓아 울면서 공부하던 책을 불살랐다. 스물한 살 때 일이다. 

스물네 살부터 중이 되어 한반도 곳곳을 유람하며 많은 글을 썼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의하는 뜻으로 벼슬길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이들을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을 비롯해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이 그들이다. 

쓸쓸한 모습의 부도탑. ⓒ 뉴스피크
쓸쓸한 모습의 부도탑. ⓒ 뉴스피크

김시습이 쓴 소설이 바로 금오산 용장사에 정착해 지낼 때 쓴 금오신화(金鰲新話)이다. 그는 날마다 맑은 물을 올려 예불하고 예불이 끝나면, 곡(哭)을 하고 곡이 끝나면 노래했으며, 노래가 끝나면 시를 지었다. 차(茶)를 즐겨 마셨으며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김시습의 삶은 단 한 번도 안주(安住)한 적이 없었다. 세상을 등졌을 때도, 방랑할 때도, 세상으로 나왔을 때도, 정착했을 때도 진리를 향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김시습. 그의 삶은 얽매임이 없는 자유 그 자체였다. 유교, 불교, 도교를 섭렵했으나 그 어느 하나에 붙들려 있지 않았다. 유학(儒學)의 기본을 포기하지 않았으면서도 승려를 자처했다. 부처를 따라 깨달음의 길을 가면서도 불제자로 알려지기를 거부했다.

김시습은 1493년(성종 24년)에 부여 만수산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웠다가 생을 마감했다. 59세였다. 그가 죽은 뒤 3년이 지나 불교 예식으로 장례를 치른 뒤 그 사리를 모신 부도탑이 무량사 근처에 서 있다. 사리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절을 돌아 나와 주차장을 지나 왼쪽으로 난 극락교를 건너면 무진암에 닿는데, 그 여정에서 부도전을 만나볼 수 있다. 

 

<무량사 산책 코스>

무량사 주차장 - 일주문 - 당간지주 - 무량사 경내(극락전, 영정각 등) - 김시습 부도탑 - 만수산 자연휴양림

무량사 버스 정보 : 부여시장 정류장에서 농어촌 버스 127 탑승, 무량마을 정류장 하차.  (소요시간 1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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