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제국 위에 세워진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
상태바
폐허의 제국 위에 세워진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
  • 윤민 기자
  • 승인 2020.06.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역스토리텔링 독일02-하

[뉴스피크]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도시의 젊음    

 

밤에 보는 하이델베르크 성. 시청 앞 광장에는 1718년 만들어진 바로크 양식의 성모마리아 상이 있다. ⓒ 뉴스피크
밤에 보는 하이델베르크 성. 시청 앞 광장에는 1718년 만들어진 바로크 양식의 성모마리아 상이 있다. ⓒ 뉴스피크

성을 내려오면 성령교회와 마주 보고 있는 시청 앞 광장이 나온다. 

시끌벅적한 거리가 앞으로 곧게 뻗어 있다. 도시의 중심가인 하우프트 거리이다. 

이곳은 이제 고성이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된 하이델베르크 대학(1386년, 선제후 루프레히트 Ruprecht I 설립)이 있는 거리이다. 

대학의 역사를 보면 그 시작은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다만 십자군전쟁으로 유입된 이슬람의 학문과 과학으로 지적 충격을 받은 유럽 사람들의 학구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유명한 선생님을 초빙하고, 교회의 건물에서 강의를 듣다가 자연스럽게 대학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중 1088년에 창립된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이 최초의 대학으로, 1150~1170년에 창립된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을 그 다음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신성로마제국은 그 한참 뒤에 1348년에 프라하 대학을, 1365년에 빈 대학을 세웠고, 세 번째이자 현재 독일에서는 최초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만들어졌다. 

당시 제국의 영주들은 대학을 경쟁처럼 설립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당시 유럽의 종교 상황과 함께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를 바라는 제후의 경쟁심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아비뇽 유수(1309~1377) 이후 로마의 교황청에 반발하여 일단의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을 세움으로써 교회의 분열이 생겼다. 이는 국가간 반목으로 이어졌고, 당시 대학교육의 요람이었던 파리에 있던 많은 교수와 학생들은 자기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야 했다. 

거리 곳곳에서 대학 건물을 만날 수 있다. 대학광장에서 만난 하이델베르크 대학 건물. ⓒ 뉴스피크
거리 곳곳에서 대학 건물을 만날 수 있다. 대학광장에서 만난 하이델베르크 대학 건물. ⓒ 뉴스피크

팔츠 선제후는 자신의 권위와 교수 그리고 학생을 위해 발 빠르게 대학을 세우게 된 것인데, 몇 가지 재미난 사실이 하이델베르크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먼저 창립자인 선제후 루프레히트 1세가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서양 중세의 세속적 지배집단인 영주들은 전사, 기사의 집단이었고 그래서 대개 문맹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전쟁의 와중에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던 당시 영주들의 용기 또는 허영심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하이델베르크라는 도시에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구가 2만, 3만에 달한 프라하와 빈에 비해 당시 하이델베르크는 많이 잡아도 5천 명에 지나지 않은 작은 도시였다는 점이다. 

게다가 하이델베르크는 영주거주도시임에도 13세기 말에는 자치를 획득하였고, 궁정과 도시 그리고 대학이 법률적으로 상호 독립적인 사회집단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재판권도 각기 독자적으로 행사했고, 지금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가 된 학생감옥 또한 대학의 사법권이라는 역사적 전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는 새벽까지 활기를 잃지 않는다. 대학가 특유의 분위기가 거기에 있다. ⓒ 뉴스피크
하이델베르크는 새벽까지 활기를 잃지 않는다. 대학가 특유의 분위기가 거기에 있다. ⓒ 뉴스피크

이런 하이델베르크만의 특징은 대학과 도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작은 도시는 외부와 외국의 학생을 불러오고, 자유로운 자치는 많은 사상가와 교육자 그리고 젊음의 활기를 불러오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덕분에 30년 전쟁과 팔츠상속전쟁을 거치면서 침체된 대학이 19세기 초반 국립대학이 되고 적극적인 지원과 투자를 받자마자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유학생에게 가장 선망 받는 유학 및 휴양지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수많은 학자와 교육자가 이곳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갔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1816부터 1818년까지 철학을 가르쳤고,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해 교수로도 재직했다. 괴테, 쇼팽 등의 예술가들이 마음의 휴식을 위해 이곳을 찾았으며, 마크 트웨인은 1878년 5월 초 유럽을 여행하는 중에 하이델베르크에서 몇 주간 머무르면서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게오르크 루카치도 1912~1918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살았다. 그를 하이델베르크로 오도록 설득한 이는 에른스트 블로흐였다. 

물론 이런 하이델베르크의 대학도 과오가 없을 수 없다. 독일에 나치가 창궐했을 때 가장 먼저 나치대학임을 자임한 것이다. 물론 이들은 이후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와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과오가 없는 곳은 거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반성하는가이다. 하이델베르크가 지성이 넘치고, 자유로운 대학도시임을 자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도시의 중심가는 자유로운 영혼과 활발함이 넘쳐난다. 하우프트 거리는 서점을 비롯한 화려한 쇼핑가가 이어지지만, 그 사이 골목 안 잔디밭과 캠퍼스에는 책을 가슴에 낀 학생들의 밝은 재잘거림은 잔잔히 흐르고 있다. 

화려한 시가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소박한 건물과 자전거 그리고 깔끔한 주택가가 거기에 있다. ⓒ 뉴스피크
화려한 시가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소박한 건물과 자전거 그리고 깔끔한 주택가가 거기에 있다. ⓒ 뉴스피크

담이 없어서 사방에 흩어져 수업을 받으러 다니는 학생들은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시내 중심 상가도 캠퍼스와 바로 연결되다 보니 시민도 마치 학교에 다니는 듯한 마음일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거리를 교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이는 독일 대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독일 대학에서는 전통적으로 한군데로 집중된 캠퍼스가 없다. 대학의 시설이나 조직이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다. 도시 속에 대학이 있고, 대학 안에 도시가 있는 것이다. 

철학자의 길에서 바라본 네카 강과 테어도르 다리 그리고 하이델베르크의 성. ⓒ 뉴스피크
철학자의 길에서 바라본 네카 강과 테어도르 다리 그리고 하이델베르크의 성. ⓒ 뉴스피크

 

학생감옥과 철학자의 길 

 

이제 예술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학생감옥의 화려한 낙서들. ⓒ 뉴스피크
이제 예술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학생감옥의 화려한 낙서들. ⓒ 뉴스피크

대학은 문화와 생명력의 기원과도 같다. 젊음과 자유분방함은 바로 우리가 겪었던 세월에 대한 향수를 전해주고, 고단하고, 반복적인 일상의 굴레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거리와 생활과의 거리감, 이건 어쩌면 도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인지도 모른다. 거리감이 커지면 그곳은 관광지일 뿐이다. 담이 없다는 것은 경계를 있는 듯 없는 듯 모호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편하게 만들어준다. 젊게 산다는 것은 어울려 산다는 것이다. 생활과 교육의 경계가 사라짐으로써 도시는 대학 그 자체가 되어 갔고, 거리는 마치 젊음의 생명수를 얻은 것과 같은 단정한 열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덕분에 하이델베르크는 대학도시, 청춘의 도시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런 젊음과 편안함의 명소는 아이러니하게도 학생감옥이다. 젊음은 마치 낭중지추囊中之錐와 같아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분출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빠져나온 열기는 도시의 활기도 되고, 사람들의 혼란이 되기도 한다. 결국, 매력도 과하면 불안이 되는 법이니, 시민은 치외법권에 있던 대학생들의 과음과 폭력 그리고 난동을 제어해줄 것은 학교에 요청했고, 학교는 1712년에서 1914년까지 약 200년간 학생들의 열기를 정화하고, 조절하는 장소로 이 학생감옥을 사용하게 되었다. 

학생감옥은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벌써 화려한 낙서와 자유분방함이 가득하다. ⓒ 뉴스피크
학생감옥은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벌써 화려한 낙서와 자유분방함이 가득하다. ⓒ 뉴스피크

그렇지만 젊음은 근본적으로 죄악은 아니다. 만약 사회가 그 젊음을 죄악시하고, 그들에게 관용과 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사회는 병들고, 늙어갈 것이다. 그래서 학생감옥은 감옥이면서 사색의 공간으로, 교류와 대화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수감자였지만 학생들에게는 물과 빵이 배급되었으며, 낮에는 수업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외부에서 먹을 것을 사오거나, 친구들이 찾아오기도 했으니, 학생들로서는 감옥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곳에 갇힐 정도의 열정이 있다는 훈장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감옥으로 쓰인 조그만 건물 3층은, 네 칸짜리의 감방과 한 칸의 화장실, 그리고 오래된 철제침상과 탁자, 의자와 함께 수감자들의 자유분방함과 장난기를 가득 담은 낙서와 그림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여행객은 이 수감시설에 갇혀 오랜 시간 전에 청춘이었을 그들의 열기를 같이 느끼기를 희망하고 있다. 

학생감옥에는 한글로 된 경고문이 있다. 왜 굳이 한글로 된 경고문이 필요했을까를 생각해본다. 젊음은 활기이지만 방종과는 다르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뉴스피크
학생감옥에는 한글로 된 경고문이 있다. 왜 굳이 한글로 된 경고문이 필요했을까를 생각해본다. 젊음은 활기이지만 방종과는 다르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뉴스피크

참으로 재미난 대비의 도시이다. 버려짐은 평화가 되고, 담이 없음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도시를 지키고 있다. 오래됨은 젊음이 되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이런 대비의 가치와 존중 속에 도시는 생명을 얻는다.  

젊음의 감옥을 나서면 고요한 네카 강이 반긴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네카 강은 부드럽고, 여유롭고 아름답다. ⓒ 뉴스피크
도시를 가로지르는 네카 강은 부드럽고, 여유롭고 아름답다. ⓒ 뉴스피크

먼저 놀이동산의 입구와 같아 보이는 두 개의 탑이 먼저 보인다. ‘브뤼켄토어’라 불리는 관문으로, 구시가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관문을 지나면 알테 브뤼케(오래된, 옛 다리)로 불리는 칼 테오도르 다리이다. 

다리는 선제후의 유산이라고 할만하다. 원래 나무로 되어 있던 다리는 홍수나 빙하로 자주 떠내려 가버렸다. 이에 튼튼한 돌다리로 만든 게 선제후였고, 그래서 다리에는 그의 석상이 자랑스럽게 세워져 있다. 다리 아래에 내려가면 홍수 수위가 표시되어 있다. 당시 그들에게 치수와 다리가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붉은 벽돌로 단단해 보이는 칼 테어도르 다리. 그 위에 선제후 칼 테어도르의 상이 세워져있다. ⓒ 뉴스피크
붉은 벽돌로 단단해 보이는 칼 테어도르 다리. 그 위에 선제후 칼 테어도르의 상이 세워져있다. ⓒ 뉴스피크

다리 위에서 바라본 지금의 네카 강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강은 고요하고, 아름답다. 강 위에는 유람선과 조정보트가 한가롭게 흘러가고 있고, 강 옆의 길로는 작은 배낭을 둘러맨 사람들의 여유로운 걸음이 스쳐 간다. 

한가로운 네카 강변의 모습. ⓒ 뉴스피크
한가로운 네카 강변의 모습. ⓒ 뉴스피크

강을 건너면 산을 오르는 산책로가 이어진다. 바로 유명한 철학자의 길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을 슐랑엔벡, 즉 뱀길 또는 꼬부랑길이라 부른다. 중세 때부터 포도 농가들이 이용하던 길이라고 한다. 처음 시작은 짙은 이끼와 낡은 돌과 벽돌로 만들어진 골목과 계단이다. 방금 지나온 밝고, 유려했던 다리와 주변 풍경이 순간 사라진 느낌이 들 정도로 짙고, 어둡고, 고요한 길이다. 그 색다름과 그럼에도 아름다움에 놀라면서 걷다보면 길은 점점 높아지고, 숨은 가빠진다. 의외로 이 철학자의 길은 상당한 체력과 인내를 요하는 것이다. 

뱀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풍경이다. 짙은 이끼가 인상적이다. ⓒ 뉴스피크
뱀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풍경이다. 짙은 이끼가 인상적이다. ⓒ 뉴스피크

어느 순간 오르막 계단이 끝나고 좌우로 넓고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드디어 철학자의 길이다. 해발 약 200미터의 높이에 거의 수평으로 나있는 길이다. 이 길을 만드는 것으로 약 50년간 논란이 있다가, 1817년 포도밭을 정리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길도 워낙 좋을뿐더러 이곳에서 보는 도시와 성 그리고 네카 강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기에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가거나 이곳에 살았던 철학자와 교수들이 자주 찾던 산책로라고 한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철학자가 아닌 사람도 철학자 못지않게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숨을 허덕이게 만드는 뱀길. 이제 철학자의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 ⓒ 뉴스피크
숨을 허덕이게 만드는 뱀길. 이제 철학자의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 ⓒ 뉴스피크

비록 철학자는 되지 못해도 아름다운 도시를 만든 지혜와 젊음에 감탄을 보낼 정도의 여유는 이 길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걷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철학자의 길. ⓒ 뉴스피크
걷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철학자의 길. ⓒ 뉴스피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