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폐허가 남긴 지혜와 아름다움, 하이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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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폐허가 남긴 지혜와 아름다움, 하이델베르크
  • 윤민 기자
  • 승인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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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스토리텔링 독일02-상

[뉴스피크]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참가한 사람들이 꼭 한 번씩을 방문하는 곳이 바로 인근의 하이델베르크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워낙 가깝기도 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고성과 강 그리고 자유로운 도시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 고성에는 독일과 유럽이 간직한 종교와 전쟁에 관한 역사가, 대학에는 자유로운 사색과 자치의 기억이, 그리고 정갈한 도시에는 유럽의 활기와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는 여유로움이 있다. 

대부분 반나절의 여행으로 끝나기 쉬운 하이델베르크로의 여행이지만, 하나씩 들춰보며 의미를 찾다보면 1박 2일로도 부족한 곳이 네카 강변의 그 작은 도시이다. 

철학자의 길에서 본 하이델베르크 성과 도시 그리고 네카 강. ⓒ 뉴스피크
철학자의 길에서 본 하이델베르크 성과 도시 그리고 네카 강. ⓒ 뉴스피크

 

높고, 낡고, 아름다운 하이델베르크 성城   

 

우리가 아는 유럽의 국가는 서로마의 멸망 이후 프랑크의 왕 샤를마뉴와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종교전쟁을 거치면서 만들어졌다. 단지 사진을 남기기 위한 여행이 아닌 이상 풍경의 이유를 찾고, 그것을 알고 감동하면서 여행은 풍족해지기 마련이다. 하이델베르크에 남겨진 고성은 역사의 굴곡이 만들어지는 격동의 흔적을 되새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의 여행은 아무래도 성을 둘러보는 것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사실 유럽과 일본으로의 여행은 성을 기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독일 5대 가도 중 하나인 고성가도가 대표적이지만, 그 외 다른 가도 역시 성과 도시를 잇는 선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저녁 무렵의 성과 도시는 더욱 아름다워진다. ⓒ 뉴스피크
저녁 무렵의 성과 도시는 더욱 아름다워진다. ⓒ 뉴스피크

성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이 많았다는 뜻이다. 중세와 근대의 유럽에서 전쟁터 노릇을 하던 독일에 다양한 형태의 성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성의 만들어진 시대와 이유, 그리고 아직까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함께 풍경의 감성도 함께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 고성가도의 전형이라고 불리는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성은 충분히 머물고, 따져볼만한 관광지임이 틀림없다. 

사실 이 폐허에 가까운 고성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고, 또한 역사가 간직한 풍경의 전형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놀라움은 호기심으로 이어지고,  구시가지의 중심에서 먼저 올려다 보이는 산 중턱의 낡은 성으로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된다. 

 

성에서 내려다보면 하이델베르크 시내와 네카 강 그리고 칼 테어도르 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 뉴스피크
성에서 내려다보면 하이델베르크 시내와 네카 강 그리고 칼 테어도르 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 뉴스피크

시내에서 성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골목을 따라 오르다보면 붉은 벽돌로 단단한 벽과 길이 나오는데 바로 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성의 꼭대기까지는 한참을 올라야만 한다.

먼지와 담쟁이가 세월을 알려주고, 부서진 건물과 수리 중인 철근들 사이를 헉헉거리며 오르면 어느 순간 앞이 환하게 트인 곳이 나온다. 옆으로는 성곽이 이어지고, 앞으로는 하이델베르크 시내와 네카 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단정하고, 유려하고 무엇보다 너무도 시원한 풍경과 바람이 감동적이다. 층을 오를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풍경과 복잡하고도 거대한 성의 구조에 놀라다보면 어느새 성의 한복판에 이르렀음을 알게 된다. 

그곳에서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건물 깊숙이 보관 중인 거대한 포도주 통을 보며 옛 영화를 기억하거나 아니면 마당을 통해 만난 건물의 화려함과 넉넉함을 만끽하는 것이다.  

성의 건물을 나서면 낡지만 편안한 마당이 나온다. ⓒ 뉴스피크
성의 건물을 나서면 낡지만 편안한 마당이 나온다. ⓒ 뉴스피크

먼저 마당을 둘러본다. 어쩌면 성에서 가장 매력적인 공간일수도 있는 곳이다. 평범하지만, 넉넉함으로 사람들을 성의 중앙으로 이끌어주고, 높이 서서 내려다보는 건물의 화려함을 시원함으로 담을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것은 마당 정면 건물, 오토 하인리히 관의 멋들어진 창문 사이에는 새겨져 있는 생동감 있고, 힘찬 조각상들이다. 그 석상과 부조의 화려함, 웅장함은 이곳이 당대의 세도가였던 선제후의 성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선제후,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은 유럽이 어떤 곳인지 찾아보다 덜컥하고 부딪힌 벽과 같은 역사였다. 하나의 제국인데도 왜 그리 많은 나라가 있었는지, 또 교황과 황제의 극단적인 갈등과 다툼 그리고 종교개혁이 불러온 그 무섭고도 오랜 전쟁까지. 그 이유와 결과를 찾아보다 보면 유럽의 중세가 암흑의 시대였다고 말이 절실히 이해된다. 

전설보다 무섭게 휘몰아치던 마녀사냥과 요즘 코로나19 이후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흑사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말 두려웠던 것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불안했던 날들 때문이 아닐까? 

유럽은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몇 백 년의 혼란은 유럽 대부분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Frankenreich과 다시 이어진 로마 황제의 전통으로 다시 수습되는가 했다가 샤를마뉴 대제의 사후 다시 분열되기에 이른다. 결국 어느 순간 신성로마제국, 특히 독일은 분열 뒤에 남겨진 무수히 많은 종족의 공작령이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특히 튀링겐, 바이에른, 알레만, 작센 등 약간 어색하면서도 익숙한 독일의 지방 명이 바로 그때의 흔적들인데, 이들은 프랑크 왕국에서 형성된 귀족계층이었으며 또한 자신의 지방을 통치하던 왕이자 영주였다. 이런 독자적인 지역 색은 아직도 현대 독일의 16주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으니,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1,600개의 독립된 영방국가들과 도시로 이루어진 혼합체에 불과했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닌 셈이다. 

비록 낡고 허물어졌지만, 겉에 보는 것보다 성은 더욱 크고, 복잡하다. ⓒ 뉴스피크
비록 낡고 허물어졌지만, 겉에 보는 것보다 성은 더욱 크고, 복잡하다. ⓒ 뉴스피크

가히 군웅할거의 시대라 할 만했던 그때, 119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 가 서거하면서 황제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다.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중재자 역할을 하고(독일 국왕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했다.), 1198년 라인지역의 세 대주교(마인츠, 트리어, 쾰른)와 라인 백작에게 독일 국왕, 즉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선출권을 부여하자는 제안을 했고, 관철되었다. 그들이 바로 선제후였다.

왕, 황제를 뽑을 수 있는 단 4명의 제후였다. 뒤에  작센의 공작과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이, 1289년에는 보헤미아의 국왕이 자격을 획득하면서 숫자가 늘어났지만, 라인 백작은 처음부터 선제후였고, 이곳 하이델베르크는 그의 거성이었다. 특히 라인 팔츠백은  최초의 4명 중 유일한 세속의 통치자였기에, 황제의 궁정을 관리하는 직위를 맡았다고 한다.

황제의 집사와도 같은 것으로 궁중 법정에서 황제의 대리자 역할을 했으니 그의 당시 지위와 위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권력에 맞게 하이델베르크 성은 유례없이 화려하게 성장한다. 

선제후 루트비히 5세에 의해 1524년 루트비히관이 세워지고, 이어 여러 건물과 도서관이 건립되었다. 이어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르네상스적 건물로 치장을 하기 시작했으며 1555년 놀라운 건축물이었던 유리관이 완성되었다. 

생생한 조각상이 인상적인 오토 하인리히관. ⓒ 뉴스피크
생생한 조각상이 인상적인 오토 하인리히관. ⓒ 뉴스피크

선제후 오토 하인리히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오토 하인리히관을 1560년 4년만에  완성하였다. 이 건축물의 전면에는 당시 통치이념을 상징했던 인문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16명의 인물상이 조각되었는데, 아직도 생생함으로 방문객을 맞이하는 그 조각상이다. 

성은 계속 확장되었다. 

성 위에 올라오면 창문만 남은 영국관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뒤에는 엘리자베트의 문에 있다. ⓒ 뉴스피크
성 위에 올라오면 창문만 남은 영국관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뒤에는 엘리자베트의 문에 있다. ⓒ 뉴스피크

1612~1615년에는 프리드리히 5세(재위 1610-1623년)가 영국 출신 부인 엘리자베트 스튜어트를 위해 바깥에 영국관을 지었다. 성 주변을 둘러볼 때 처음으로 만나는, 오직  창틀만이 남아 있는 건물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앞으로 1615년에는 그녀의 생일을 위해 엘리자베트의 문을 세웠다. 이 문은 하룻밤 만에 만들었다는 전설과 함께 아직도 성을 찾는 이들에게 성의 시작과 건재함을 알리고 있다. 

 

거대한 술통과 종교전쟁 그리고 팔츠상속전쟁 

 

건물과 그 주변의 잔해만으로도 놀라운 성은 그 안에 더욱 놀라운 것이 자리하고 있다. 약 5만 8080갤런(약 22만 리터)의 포도주를 담을 수 있어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하이델베르크 툰Heidelberg Tun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술통은 아직도 성의 지하에서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지하실을 가득 채운 그 술통은 높이가 7미터이고, 길이는 8미터이다. 실제로 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작은 동산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그 기분을 만끽하라는 것인지 술통 옆에는 위로 올라가는 40여 층의 나무 계단이 있다. 몇 번 굽어져 그 술통의 끝을 올라보면 여럿이서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나타난다.

그렇게 삐걱거리며 계단을 오르다 보면 계단이 한번 꺾어지는 곳에서 세상으로 뚫린 조그만 창을 만나게 된다. 그 좁은 창틀을 통해 들어오는 환한 빛은 실내의 어둠을 더욱 강조해준다. 단지 술통을 구경하는 게 아니라, 이곳을 살았던 영주의 낭만, 향락과 함께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체험하는 듯하다.

아마 이런 거대한 술통은 자기 과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시의 뒤편에는 전쟁으로 지새우던 중세의 삶에 대한 불안, 자신의 권력에 대한 집착 그리고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세상에 대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복잡함을 달래기에는 향긋한 포도주만큼 좋은 것도 없지만, 그걸로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거대한 와인통. 와인저장통은 하나만이 아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 뉴스피크
거대한 와인통. 와인저장통은 하나만이 아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 뉴스피크

결국 성은 결국 종교 전쟁(1618~1648)과 팔츠 상속전쟁의 격랑 속으로 빠지게 된다. 

학교 때 배우던 유럽의 역사에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나온다. 수많은 사건 중 하나로, 단지 연도와 이유를 배우면 되는 항목이지만 유럽에서는 당시의 흔적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다. 인간을 위로하는 종교가 분쟁과 전쟁의 씨앗이 되는 것이 놀랍다.

더 놀라운 것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 신앙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차별과 폭력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의 흔적과 그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기념하지만 아직 인간은 전쟁을 불러오는 자신의 미성숙이나 믿음의 편협함 또는 종교를 이용한 권력에 대한 집착이라는 과오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와인통을 오르는 길에 만나는 작은 창문. 단단하고, 그래서 더욱 불안해 보이는 창문이다. ⓒ 뉴스피크
와인통을 오르는 길에 만나는 작은 창문. 단단하고, 그래서 더욱 불안해 보이는 창문이다. ⓒ 뉴스피크

어쨌든 종교개혁 이후 유럽은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졌다. 불안한 평화와 작은 충돌은 1618년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지역)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1578~1637)가 신교의 종교 자유를 보장했던 칙령을 취소하면서 30년 종교전쟁으로 이어졌다. 이에 1619년 보헤미아 의회는 팔츠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1596~1632)를 왕으로 세우니, 하이델베르크 성은 전쟁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먼저 틸리 백작이 이끄는 신성로마제국과 가톨릭 동맹의 군대가 1622년 9월 하이델베르크 성을 점령했다. 이어 1630년대 신교측의 대반격이 있었고 스웨덴 군이 1633년 5월 5일 하이델베르크 시를 점령하고 성에 불을 질렀다. 이후 몇 번의 공방으로 주인은 계속 바뀌었고 성은 하나둘씩 파괴되어 갔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교전쟁이 일단락되었지만, 성의 화려함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잠시의 평화에 이어 또 다른 전쟁이 하이델베르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팔츠 상속 전쟁’ (1638~1697, 9년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이 하이델베르크를 휩쓴 것이다. 

종교전쟁 이후 팔츠 선제후인 카를 루트비히(재위 1649~1680)는 1671년에 딸 리젤로테 폰 팔츠Liselotte V. Pfalz를 당시 유럽의 패권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프랑스의 국왕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혼인시켰다.

일종의 결혼동맹으로 평화와 안정을 추구한 셈인데, 문제는 1685년 카를 루트비히의 아들 카를 2세(재위 1680~1685)가 후사가 없이 죽으면서 발생했다. 뒤셀도르프에 거주하는 가까운 친척인 필리프 빌헬름(재위 1685~1690)이 팔츠 선제후국을 상속하게 되자,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자신의 동생과 딸의 결혼 사실을 근거로 팔츠의 상속권을 요구한 것이다.

이 요구는 거절되었고, 1688년 9월 프랑스 군대가 팔츠 선제후국으로 진격해왔다. 전쟁은 성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남겨주었다. 1689년에 도시의 주요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1693년에는 도시 전체가 불타버렸다. 고성도 그해 9월에 프랑스 군에 의해 폭파당하면서 궁정은 더 이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하이델베르크는 그야말로 완전 폐허의 상태에 직면했던 것이다. 

1697년의 종전과 더불어 시작된 도시 재건이 시작되었다. 기존의 토대 위에 그 당시의 건축 양식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면서 중세의 토대 위에 바로크 도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 이 단정하고, 독특한 하이델베르크의 모습은 18세기에 형성된 것이다. 

도시는 다시 세워졌지만, 성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일부 재건하고 한동안 선제후궁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1720년에 인접한 도시인 만하임으로 수도를 옮겨버린 것이다. 하이델베르크는 이제 지방도시로 전락했고, 남은 것은 대학뿐이었다. 

한가로운 고성의 마당. 여기서 열리는 한여름밤의 축제를 상상해본다. ⓒ 뉴스피크
한가로운 고성의 마당. 여기서 열리는 한여름밤의 축제를 상상해본다. ⓒ 뉴스피크

그런데 어쩌면 이때부터 진정한 하이델베르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성을 떠돌던 불안은 사라졌다. 비록 지나가는 파괴와 약탈로 황폐화는 될지언정 성에 얽매인 사치와 불안은 멈춰진 것이다. 잔해는 다른 성의 건축 자재로 이용되었고, 심지어 주민들에 의해 채석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제 사람들은 하이델베르크 성의 주인임을 더는 주장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내던졌던 견고한 폐허를 자연이 다시 가꾸기 시작했다. 색을 좀 더 부드럽게 만들고, 허물어지고 녹슨 곳을 나무와 풀로 세심하게 다듬어 놓음으로써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공간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성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현재 이곳을 가꾸는 주인은 자연인 셈이다. 거기에 인간의 욕심이 사라지니, 자족이 만든 풍경과 버림으로 만든 평화가 바로 그곳에 있다. 

그래서 남겨진 성과 마당은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곳이 되었다. 

좋은 공간이 있으면 그곳을 활용하고자 하는 게 사람들의 심리이다. 옛 제후들은 이곳에서 축제와 공연을 했다면, 지금의 후손들은 이곳에서 연극제와 음악제를 열고 있다. 한여름 시원한 산 아래, 신비한 고성에서의 공연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황홀한 체험이지 않을까? 

물론 위기도 있었다. 한때 벌어졌던 하이델베르크 고성 논쟁이 그것이다. 성을 복구하고자 한 것인데, 어떤 형태로든 성에 손대는 것에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대학의 교원들도 이 운동에 합류하였다. 그들은 “유지하고 오직 유지할 뿐이다.”이라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거의 문화적 유산을 가능한 한 자신들의 해석이나 논리로 덧칠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보존해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오트 하인리히관 복구 계획은 결국 1903년 12월 폐기되었고, 성은 자연과 역사에 더욱 가까운 풍경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보존이 진정한 역사교육이 아닐까 싶다. 전쟁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이유를 전달하는 것, 그게 역사 풍경의 이유이며 하이델베르크 성이 아름다운 이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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