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과 낙화암 : 백제의 황혼, 아름다움과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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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과 낙화암 : 백제의 황혼, 아름다움과 오해
  • 윤민 기자
  • 승인 202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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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스토리텔링 부여01

[뉴스피크] 부여는 백제의 고장이다. 부여 곳곳에 백제의 인물과 전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그중 백미는 아마 백제의 왕궁이 있었던 부소산과 그 주변이 아닐까 싶다. 도도하게 흐르는 백마강과 부드럽게 솟아오른 부소산, 그리고 잔잔한 흔적으로 남은 백제의 유적은 함께 화려했지만 극적이었던 백제의 황혼을 말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루터 주변의 유명 맛집과 아름다운 카페도 흥미롭고, 부소산을 수호하듯 펼쳐진 상가와 독특한 건물들도 재미있지만, 그래도 부여의 그 어느 곳보다 호젓한 부소산. 그곳에서 고요한 산책은 백제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인 듯하다.

부여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부소산은 백제왕실의 후원 역할을 했으며, 사비 백제의 최후 보루였고, 아주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앉아 이곳을 지켜봐온 부여의 터줏대감이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지 않고 어찌 부여를 봤다 할 수 있으랴.

부여의 터줏대감 부소산성을 만나다. ⓒ 뉴스피크
부여의 터줏대감 부소산성을 만나다. ⓒ 뉴스피크

만만치 않은 부소산 

 

거친 박석 위로 걸음을 뗀지 5분이나 되었을까? 산 초입부터 번듯한 사당을 만난다. 백제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는 삼충사(三忠祠)다. 삼충사의 터는 처음부터 삼충사의 것은 아니었다.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신사 ‘부여신궁’을 조성했던 터다. 1937년 7월 31일 일본 천황은 직접 부여신궁의 공사를 발표했다.

일제는 아마도 ‘조선과 일본은 본래 하나이기에 조선이 받는 착취는 정당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대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파해준 백제의 왕도 부여는 이러한 내선일체의 논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에 매우 적절한 곳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으로 부여신궁을 완성하지 못했고, 1957년 그 자리에 삼충사를 세웠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모르나, 지혜로운 용도 변경이다. 그 반전이 갖는 상징성 또한 크고 깊다. 

부여가 사랑하는 백제의 세 충신 성충과 흥수 그리고 계백을 기리는 삼충사. ⓒ 뉴스피크
부여가 사랑하는 백제의 세 충신 성충과 흥수 그리고 계백을 기리는 삼충사. ⓒ 뉴스피크

삼충사의 세 인물 또한 너무도 흥미롭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만나기로 하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길 양쪽으로 한가득 솔잎이 덮인 향긋한 산길이 이어진다. 시원한 향기가 마음을 터주는 야트막한 고갯길에 흐르는 편안함에 잠시 마음을 내려놓는다. 나무 사이로 한가로운 부여읍내의 모습도 얼핏 스쳐 지나간다. 도심 속의 산, 그 극적인 휴식이 주는 위안은 1400년 전 북적이던 백제 왕궁을 잠시 벗어났을 때도 그대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심하진 않은 경사라도 한참을 걸어오니 살며시 숨이 잦아드는 게 느껴진다. 편안한 산책길이라도 경사가 주는 변화는 몸에 기분 좋은 긴장을 준다. 달아오른 몸에 바람이 더욱 시원하게 닿아올 때쯤 테뫼식 산성길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왼편으로 갈라져 올라가는 흙길이 보인다. 

부소산을 오르는 길은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편안하다. 부여읍을 바라보며 숲길을 걷는 여유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 뉴스피크
부소산을 오르는 길은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편안하다. 부여읍을 바라보며 숲길을 걷는 여유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 뉴스피크

부소산성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토성이다. 이 산성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서기 538년 이전에 이미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산성을 쌓는 방식은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산 능선과 골짜기의 형태를 그대로 이용해 성을 쌓는 포곡식(包谷式)과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머리띠를 두르듯 성곽을 쌓는 테뫼식이 바로 그것이다. 부소산성은 두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높지는 않지만 그 위치가 부여의 중심인 이곳이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부소산의  높이는 해발 106미터이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은근한 오르막에 숨이 바빠진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산이다.

가파른 흙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능선이자 성벽에 올라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산을 감아 흐르듯 부드럽고 단단하게 솟아오른 발아래 벽이 바로 최후의 보루이자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는 산성임이 아래로 펼쳐진 가파른 경사를 보니 실감이 난다. 이토록 온화하게 펼쳐진 흙벽이 기어오르려는 나당연합군과 위에서 필사의 투쟁으로 맞서 화살을 쏘던 백제 병사가 처절하게 맞붙던 지점이었다니. 이곳이 지닌 또 하나의 아픔이 무심한 바람에 실려 온다.  

숨이 턱 밑에 왔을 즈음, 영일루를 만난다. 말 그대로 ‘해를 맞는 누각’이다. 탁 트인 2층에 오르면 재미난 모양의 상형글자가 보이는데, 이를 곰곰이 살피니 인빈출일(寅賓出日), 즉 ‘삼가 공경하면서 뜨는 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원래 이곳엔 임금이 매일 올라가서 계룡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 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영일대(迎日臺)가 있었다고 하니, 그 마음을 되살리려 적어둔 듯하다. 이후 그 전통을 이어가고자 건물지에 홍산 동헌의 관아문을 옮겨와 영일루라 이름 붙인 것이 지금의 누각이다. 남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백마강을 건너 성흥산성과 구룡평야도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부소산성의 안쪽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영일루. ⓒ 뉴스피크
부소산성의 안쪽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영일루. ⓒ 뉴스피크

영일루를 지나 요깃거리를 파는 매점을 지나면 불에 탄 곡식들이 발굴된 군창지와 당시 움집터가 발견된 수혈건물지가 나온다. 이제부터는 부소산성의 안쪽 지역이다. 옛 사람들의 생활을 그리며 걷다 보면 왼쪽으로 반월루에 닿는 길이 나온다.

백마강이 반달 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의 서쪽 마루 위에 우뚝 선 이 건물에 오르니 이제야 부여 시가지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보인다. 오래전 도성을 굽어 내려다보던 왕의 마음으로 오밀조밀 구획을 갖춰 부채살처럼 뻗어 나간 이곳 사람들의 터전을 굽어본다. 

부소산의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르니 사자루가 있다. 그곳에 올라 바람이 맞는다. 절벽 아래에 백마강은 유유히 흐른다. 원래 이곳에는 송월대가 있었다. ‘달을 보낸다’는 뜻이다. 앞서 영일루에서는 해를 맞았는데, 이곳에서는 달을 보낸단다. 백제왕실의 흥취가 그곳에서 느껴진다. 

사자루는 1919년 임천관아의 정문 배산루를 옮겨와 현판을 바꿔 단 누마루이다. 누를 옮겨 세울 때, 보물 제196호 ‘금동정지원명석가여래삼존입상’이 출토되었다. 높이 8.5cm의 조만한 금동불이지만, 깨진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이 불상의 역사적 가치를 높였다. 명문은 ‘정지원이라는 사람이 죽은 아내를 위해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저승길을 잘 가게 했다’는 내용이다. 

부소산의 기억은 왜 이리 슬픈 것일까? 

부소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만나는 사자루. 영일루에서 해를 맞고, 이곳에서 달을 보낸다. 당시의 풍류가 애잔하게 느껴진다. ⓒ 뉴스피크
부소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만나는 사자루. 영일루에서 해를 맞고, 이곳에서 달을 보낸다. 당시의 풍류가 애잔하게 느껴진다. ⓒ 뉴스피크

전쟁의 아픈 추억과 왜곡된 기억, 낙화암  

 

이제 길은 백마강으로 이어진다. 내리막을 지나 다시 오르는 길의 끝엔 깎아지른 절벽이 기다리고 있다. 얼핏 보기에도 아찔한 이곳에 올라서니 두려움을 넘는 굳은 마음으로 자신을 지켜낸 여인들의 강하고도 처연함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낙화암 절벽이 붉은 이유는 당시 여인들이 흘린 피 때문이라는데, 과연 그 말처럼 군데군데 붉은 빛이 눈에 띈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절벽 위 정자 ‘백화정’에 오르니 아주 오래전 이곳을 채웠던 슬픔이 공기에 섞여 든다. 

백마강을 가로지는 황포돛배를 내려다보며 백제 120년 영화가 사라진 그 밤을 상상해본다. 

화려하고 단정하고 거대했던 사비성은 하나둘씩 깨지고 부서져, 부소산 기슭의 궁궐마저도 거센 불길에 농락당할 때. 사람들은 울며불며 이리 뛰고 저리 달렸지만 낮고 부드러운 부소산은 그들을 품을만한 계곡과 숲이 없었다. 그렇게 밀리고 밀려 궁녀와 신하 그리고 가족은 결국 낙화암으로 차례로 모여 들었을 것이다. 도시를 태우는 불길로 세상은 환했고, 뒤로는 비명소리와 함성소리가 뒤쫓듯 올라오고 있었다. 

낙화암 가는 길에 만나는 백마강. ⓒ 뉴스피크
낙화암 가는 길에 만나는 백마강. ⓒ 뉴스피크

‘슬퍼하며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아라!' 

망국백성으로 치욕을 맛보느니 ‘타사암'에서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한 궁녀들. 떨어지는 속도를 이기지 못해 얼굴을 뒤덮은 치맛자락이었지만 슬픔을 감추기에는 충분했다. 오로지 고요한 백마강만이 그들을 품을 수 있었지만, 속절없이 떨어진 그녀들을 품으며 그 강도 함께 서러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타사암은 ‘사람이 떨어진 바위'가 아닌 ’꽃이 떨어진 바위'인 낙화암이 되었다. 

하지만 낙화암 이야기가 슬픈 건 속절없이 사라짐 때문만이 아니었다.  

향락에 빠져 나라도 지키지 못한 왕도, 낙화암과 백마강을 가득 채웠던 삼천궁녀도 거기에는 없었다. 

거기에는 서동요로 알려진 무왕의 맏아들로 ‘해동의 증자’라 할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던 의자왕이, 30세가 넘어 된 세자였지만 귀족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성 100여 개를 함락시킬 만큼 용맹했던 백제의 마지막 왕이 있었을 뿐이다. 

삼천 궁녀도 조선시대 시인 민제인이 쓴 ‘백마강부’라는 시에서만 화려하게 등장하였을 뿐이다. 사비성의 인구가 5만이었고, 조선시대의 궁녀가 최대 6백 명이었으니 ‘삼천’이라는 숫자는 단지 호사가들의 비유였던 것이다. 

부여와 금강 그리고 벌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백화암. ⓒ 뉴스피크
부여와 금강 그리고 벌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백화암. ⓒ 뉴스피크

의자왕의 최후 역시 백마강도 아니고, 웅진성도 아닌 당나라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웅진의 수성 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왕이 동맥을 끊었으나 끊어지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이어 가니...”라며, 배신한 부하와 외세의 기댄 세력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에게 백제는 낙화암과 삼천궁녀 그리고 호색하고 무능한 정치 어름에 머물러 있다. 승자가 쓴 역사에 기대고, 중화의 학문을 숭상한 이들이 풀어놓은 자료로 공부하며, 슬픔을 낭만으로 치장하고 덮어버린 호사가의 화려한 언변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화암은 여전히 시리도록 슬플 수밖에 없다. 

그들의 가슴 아픔과 서러움이 오직 방탕과 혼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찔한 절벽에 올라선다. 낙화암이 바로 이곳인 듯하다. 당시의 슬픔보다 역사를 제대로 전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 뉴스피크
아찔한 절벽에 올라선다. 낙화암이 바로 이곳인 듯하다. 당시의 슬픔보다 역사를 제대로 전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 뉴스피크

* 백제의 사비 천도

백제는 세 차례 도읍을 세웠다. 가장 세력이 크던 시기에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한성(서울)에 자리를 잡았지만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한성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왕궁을 지키기 위해 새로이 세운 도읍이 요새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웅진(공주)이었다. 언제 또 침략을 받을지 모를 일이었기에 안전한 곳에서 방어를 꾀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 나라가 점차 안정세에 접어들 때쯤 왕권을 잡았던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꿈꾸며 더 넓고 풍요로운 땅을 찾아 나선다. 그때 성왕의 눈에 든 것이 바로 사비(부여)였다. 

 

* 부여 역사 둘레길 

 

 걷기 여행이 유행이다. 찬찬히 걷고, 그 풍경을 가슴에 담고 싶기 때문이리라. 

 잔잔하고, 여유로운 부여는 걷기 여행이 제격인 고장이다. 

 도시의 이곳저곳으로 갈래를 뻗고 있는 부여의 역사 둘레길을 만나보자. 

 

백마강길 

백마강길은 찬란했던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부소산성을 시작으로 하는 탐방길을 걷다 보면 백제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문화재들을 접할 수 있다. 

 부소산길과 천정대, 문화단지 그리고 왕흥사지길을 거쳐간다. 또한 궁남지와 구드래조각공원까지 이어지니 백제의 중심을 걷는 길이라 할 수 있겠다. 

 

부소산길 - 백제보길 - 천정대길 - 문화단지길 - 왕흥사지길 - 부산길 - 희망의 숲길 - 선화공원길 - 궁남지길 - 구드래조각공원길 

총 24킬로미터 

 

사비길 

백제의 수도는 사비였고, 사비는 곧 부여이다. 부여는 사라진 사비 이후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그 사이의 간격을 상상으로 메우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부여읍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건물의 고도와 개발이 제한되어 있다. 고도가 낮고 조용한 시공 풍경으로 다가오는 사비길은 백제의 숨결을 느끼며 걸을 수 있는 15킬로미터에 달하는 역사문화탐방로이다. 

부여버스터미널 - 신동엽 생가와 문학과 - 서동공원 - 군수리사지 - 궁남지 - 백제오천결사대충혼탑 - 굿뜨래 웰빙마을 - 능산리 고분군, 능산리 사지 -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 5층 석탑 - 부소산성 

 

* 지난 10년간의 스토리텔링 노트를 정리한다. 역사도 아니고, 지리도 아니고 또한 전설도 아닌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지역과 사람을 좀 더 가깝게 만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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