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구하는 데 성별이 대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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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구하는 데 성별이 대수인가?
  • 윤민, 이지현 기자
  • 승인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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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스토리텔링]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

[뉴스피크] 나라 안팎이 소란스러운 시기이다. 30여 년간 이어져오던 운동이 논란의 중심이 되고, 역사의 죄인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소리치는 놀라운 풍경도 펼쳐진다. 죄는 밝혀내고, 왜곡됨은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들에 대한 고민과 존중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저항했던 여성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통해 아직 죄를 뉘우치지 않고, 과거를 부정하는 이들에게 편승하는 현실을 짚어보고자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

 

누군가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용감히 싸웠던 독립운동가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들은 대다수가 남성이라는 것이다. 

무장투쟁을 하고 폭탄을 던진 사람도, 독립을 위해 정치조직을 꾸린 사람도, 저항시를 쓴 것도 모두 남성이다. 물론 이에 곧바로 수긍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어떤 여성 독립 운동가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유관순 열사 외에 딱히 떠오르는 이가 없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영화 '항거'를 통해 다시금 우리를 찾아온 유관순 열사. ⓒ 뉴스피크
영화 '항거'를 통해 다시금 우리를 찾아온 유관순 열사. ⓒ 뉴스피크

과연 일제 치하 36년 동안 독립운동을 했던, 그리고 우리에게 그 이름을 널리 알릴만한 여성이 유관순 열사 단 한 분뿐이었을까? 정말로 모든 독립을 위한 활동은 남성이 주도하고 여성은 역사적 무대의 바깥에 머무른 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을까? 

물론 대부분의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에 새겨지지 못했을 뿐, 그 시기에 생생히 존재했다. 3.1운동 때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결코 남성만이 아니었으며,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에 홀로 나온 여학생이 아니었다. 3.1운동뿐 아니라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성들의 직업과 상황, 그리고 독립 운동에 기여한 양태 또한 다양했다. 남성 독립운동가의 조력자로부터 직접 무력투쟁에 참여한 여성까지, 이들은 사회의 통념이 요구해 온 전통적 여성상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다만, 신여성 등 많은 이야기를 남겨 놓은 여성들이 아직 우리의 기억에 선명한데, 유독 독립운동에 헌신한 가장 아름다운 그분들을 우리가 알지 못한 현실에 대한 고민과 반성이 필요할 뿐이다. 요즘 불매운동에 외치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하는 말이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이다. 불매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을 찾고, 기억하는 것 역시 ‘백구’가 되려고 온갖 술책을 다하는 ‘황구’를 경계하기에 더없이 좋은 일이 아닌가 싶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들

 

흔히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우선 기록된다. 개인으로 널리 알려진 유관순은 당시 이화학당에 재학 중이었고, 여학생 집단을 대표했다. 유관순처럼 3.1운동에 나선 여학생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전후해 조직된 부인회가 기존에 알려진 여성들의 집단적 참여 사례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한 여학생이나 부인들이 모두 후방 지원 활동에만 참여했던 것은 아니었다.

1895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한 후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났고, 그 중에는 여성 의병장도 있었다. 윤희순(1860~1935)은 강원도 춘천에서 시아버지를 따라 의병 투쟁을 하다가 여성 의병대까지 조직하였고, 1911년에는 일가족과 만주로 망명하여 ‘노학당’이라는 민족학교, 그리고 조선독립단 및 가족부대를 설립하기도 했다. 영화 <암살>의 모티브가 된 남자현(1872~1933)은 의병으로 나갔던 남편이 먼저 죽은 후 1905년 을사늑약 때 부친을 도와 의병 활동에 가담했다. 3.1운동에도 참여한 남자현은 같은 해에 중국 요령성으로 망명하여 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켰고, 자신은 ‘서로군정서’라는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죽기 직전까지 무장투쟁 및 거사에 직접 투신하였다. 결국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6개월간 갖은 혹형을 받고, 단식투쟁을 전개하다가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영화 '암살'과 경북 영양에 있는 남자현 생가.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적극적이었던 항일 독립투사였다. ⓒ 뉴스피크
영화 '암살'과 경북 영양에 있는 남자현 생가.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적극적이었던 항일 독립투사였다. ⓒ 뉴스피크

안경신(1888~?)은 평안도에서 평양여고 2년 과정을 수료한 기독교인으로, 평양에 본부를 두었던 대한애국부인회에 소속된 부인이었다. 그는 무력투쟁으로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고, 대한광복군 총영에 몸담아 폭탄 투척 거사에 지원하기에 이른다.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할 때 안경신은 33세였고 임신 중이었다. 그는 피신처에서 낳은 아이를 안고 체포되어 재판에 섰고 6년 동안 징역을 살았다. 출옥 이후에는 행적 불명으로, 1962년 3.1절에 추서된 건국훈장 국민장을 정부가 보관 중이다. 

또 평안도에서 태어나 만주로 이주한 오광심(1910~1976)은 1940년 9월 중국 중경에서 창설된 임시정부 광복군에서 활동한 여성 광복군이었다. 평양 출신이며 상해로 망명하여 운남성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한 권기옥(1901~1988)은 임정에 소속된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공군 대령이었다. 부산 출신의 박차정(1910~1944)은 근우회 활동을 하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원봉과 혼인하고 남경에서 조직된 민족혁명당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선의용대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고 총상으로 사망했다.

 

독립을 위해 일어난 각계각층의 여성들

 

유관순보다도 앞서 이화학당에서 배출된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바로 김란사(1872~1919)이다. 성씨와 신분 등, 그에 대해서 잘못 알려진 바를 얼마전 유가족이 바로잡았다. 김란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한 후 1902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에 유학하여 한국 여성 중에서 최초로 문학 학위를 받았고, 귀국하고 나서는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화학당 학감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준 그는 영어에 능통하여 1910년 고종의 통역과 독립운동 연락책을 맡기도 했다.

김마리아(1891~1944) 또한 정신여학교를 나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여성이었고, 유학 당시부터 여성 유학생을 규합하여 활발히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2.8 독립선언 이후 귀국하여 1919년 3.1 운동 때 황해도 등지를 돌며 만세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3.5 남대문역 만세 시위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서대문감옥에 갇히기도 했던 김마리아는 출옥 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회장을 맡았으며 1921년 중국에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도 활동했다. 미국 유학 생활을 거쳐 1933년 다시 귀국한 그는 신학을 강의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끝내 고문후유증으로 광복 한 해 전 사망했다.

비단 교육을 많이 받았던 계층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성 직업인들도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제주에서는 부춘화(1908~1995)를 비롯한 해녀들은 1932년 일본 경찰에 맞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우도 해녀들은 세화와 종달, 하도리 해녀들과 함께 1932년 1월 12일 세화 오일장날 집단 봉기를 일으켰다. 1932년 1월 극렬하게 불타오른 해녀항쟁은 3개월 동안 제주 동부 지역에서 연인원 17000명의 해녀가 참가한 국내 최대의 여성집단의 항일투쟁이면서 최대의 어민봉기였다. 우도에서만 약 300여 명의 해녀가 참여했고, 1월 26일에는 우도면 해녀 800여 명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피의자 검거 차 우도에 건너온 경관들에게 격렬히 항의하기도 했다. 지금도 천진항에 내리면 항일해녀기념비가 찾아온 이들을 반기고 있다. 

우도를 찾는 이들을 반기는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 스쳐가듯 만나는 우리 역사의 영웅들이다. ⓒ 뉴스피크
우도를 찾는 이들을 반기는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 스쳐가듯 만나는 우리 역사의 영웅들이다. ⓒ 뉴스피크

수원에서는 1919년 3월에 김향화(1897~?)를 비롯한 수원기생조합 소속 기생 30여인이 수원경찰서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여 수원에서 꺼져가던 만세운동의 불씨를 되살렸다. 신채호의 아내이기도 한 박자혜(1895~1944)는 조선총독부 소속 의원에서 일했던 조산부(간호사)였으며, ‘간우회’를 조직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유치장에 수감되었고, 불순분자로 낙인찍히자 북경으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각 지역을 돌아다니다보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름 없는 영웅들을 수없이 만나게 된다. 여성독립운동가들 역시 이들 외에 대한민국 각지에서, 만주와 중국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독립에 기여한 이들의 노고와 공로는 나누어질 수 없다. 그런데 역사 기록이나 기념, 기억 등이 아직 완전하지도 하고, 여전히 차별이 남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1908년(순종 2)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의 설계에 의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인 경성감옥으로 건축되었다.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개칭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허위·유관순·강우규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수감되었던 민족수난의 현장이었다. ⓒ shutterstock
1908년(순종 2)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의 설계에 의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인 경성감옥으로 건축되었다.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개칭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허위·유관순·강우규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수감되었던 민족수난의 현장이었다. ⓒ shutterstock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복권을 넘어서서 우리가 기억하는‘독립운동가’속에 여성이 자연스럽게 포함되어야 할 것이며, 여성을 넘어 우리 모두의 독립운동이자 역사로 공고히 자리하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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