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이주·노년 등 오늘의 현실을 남도의 구수한 입말로 생생하게 담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이은 또 하나의 명작 “편견 너머의 이웃 발견하다”

[뉴스피크] 40만 독자에게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했던 정지아 작가가 4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찌니주의보』(창비)를 들고 돌아왔다.
전작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이념과 역사의 비극을 눈물겨운 해학과 인간애로 풀어내 큰 찬사를 받았다면, 『찌니주의보』는 평균 연령 일흔여덟 살의 평화로운 산골 ‘수평마을’을 배경으로 성소수자라는 낯선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유쾌하고도 뜨거운 공동체의 풍경을 소개한다.
『찌니주의보』는 첫 장부터 독자를 폭소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다. 마을의 자칭 지식인이자 실세인 ‘윤 선생’이 마을회관에 노인들을 긴급 소집해 폭로한 중대 사건은 서울에서 귀촌한 두 젊은 여성 성진과 혜진, 일명 ‘찌니들’에 관한 것이다. 그들이 “여자끼리 좋아하는” 이른바 ‘레지’라는 소식에 마을은 발칵 뒤집힌다. 어르신들이 아는 ‘레지’는 레즈비언이 아니라 다방 레지를 뜻하던 옛말이라, 마을회관은 한바탕 엉뚱한 소란이 휩쓴다.
하지만 진짜 갈등은 그 이후부터 시작된다. 여자끼리 함께 살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뿌리 깊은 편견 앞에서 찌니들은 쫓아내야 할 불순한 존재로 내몰린다. 세상의 눈초리를 피해 시골로 내려온 두 사람 역시 문을 걸어 잠그며 일촉즉발의 ‘찌니주의보’가 발령된다.
『찌니주의보』는 갈등을 예쁜 정답이나 완벽한 화해로 포장하지는 않는다. 판을 흥미롭게 흔드는 이는 20년 전 시집와 이방인으로 살아온 마을이장의 베트남인 아내 쑤언이다. “갸들이 사램을 죽였어?”라며 거침없이 찌니들을 감싸는 쑤언의 존재는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특히 촌로들의 모순적인 태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찌니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흉을 보면서도 문고리에 시래깃국과 가지나물을 슬며시 걸어두고, 낯 뜨거운 질문을 던진 뒤 돌아서다 말고 갓 부친 호박전을 손에 쥐여준다. 미움과 걱정, 자존심과 오기가 징글징글하게 뒤엉킨 이 불완전한 손길들은 완고한 관념보다 구체적인 일상과 온기가 더 강하다는 진실을 전해준다.
결정적으로 마을을 가장 격렬하게 배척하던 윤 선생이 마지막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마을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손을 내민다. “암만 미와도 워쩌겄냐. 물에 빠진 놈 일단 건져는 놓고 봐야제.”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해서가 아니라,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나누어온 이웃이기에 벼랑 끝에서 서로의 숨을 붙들어 주는 것이다.
황석영 소설가는 『찌니주의보』에 대해 “우리가 잘 알면서도 잊고 지냈던 이 해학적 마당극 같은 소설은 당장 눈앞에 영상이 펼쳐지듯 단숨에 빨려드는 재미가 탁월하다”며 “가장 지역적인 남도의 입말로 퀴어와 이주, 노년과 돌봄이라는 오늘의 문제를 생생하게 펼쳐 보였다”고 극찬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이념 너머의 한 사람을 발견하게 했다면, 『찌니주의보』는 편견 너머의 살가운 이웃을 포착해 낸다. 사람에게 지쳤으면서도 끝내 사람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에게, 정지아 작가가 건네는 『찌니주의보』는 맵고 짜고 눈물 나게 맛있는 인생 한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