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피크] ‘토론을 잘 하기 위한 방법, 회의와 모임 운영을 잘 하는 방도’에 대하여 일면식도 없는 다른 지역의 한 시민단체에서 강연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진보정치의 일선에서 활동했고, 통합진보당 대변인이었다는 경력 때문에 ‘정치’와 관련된 강의는 준비할 때가 많습니다.
화성노동인권센터 소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노동과 인권’에 대한 강연도 심심찮게 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토론’에 대한 강연요청은 처음이라서 고민을 좀 했습니다. 결국 수락을 했던 이유는 언젠가는 정리를 한번 해보고 싶었던 주제이기도 했고, 또한 ‘토론’이라는 것 역시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자료들을 보면서 ‘토론을 잘 하는 방법’을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아이들에게 ‘한글을 깨치게 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책읽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방법’도 필요하겠지만 이에 앞서 정상적인 ‘토론’이 가능한 사회적 분위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토론’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분위기로는 두 가지를 꼽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반(反)정치주의’입니다. 사실, 근대적 의미에서 ‘토론의 시작’은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습니다. 고대에서부터 사회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체계로서 ‘정치’는 있어왔으나 ‘토론하는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기 시작한 것은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과정과 떼어낼 수 없습니다.
이른바 ‘토론 교과서’에서 ‘토론하는 행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의회나 국회에서 어떻게 토론을 할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다양한 토론의 규칙과 방도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정치’는 일종의 금기어입니다. 공공연하게 정치를 폄하하고 혐오하는 분위기가 유포되고 있습니다. ‘시민의 의사와 토론으로부터 만들어진 정당’, ‘정당들간의 치열한 토론을 통한 생산적인 정치’가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정치일정인 ‘대통령 선거’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 주장만 앞세우고 상대방을 깍아내리는 것 또는 서로 적당히 체면을 세워주는 선에서 그치기 일쑤입니다.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처음으로 토론다운 토론을 시도해보았던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에 대해 쏟아졌던 무차별적인 비난이 바로 이런 풍토에서 가능했던 일이지요.
두 번째는 이른바 ‘중도주의’입니다. 사실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난감합니다. 평균주의? 중도주의? 다른 말로 하면 ‘튀지 않기’가 더 적당하겠습니다. 토론은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눈치껏 튀지 않고 적당히 살기’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존재합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해방 이후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승만의 독재정치,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정치를 수십년간 거쳐오면서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를 힘으로 내리누르는 분위기가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했습니다. ‘군대 문화’라고도 일컬어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상적인 토론’은 가능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근 출마 포기를 선언한 반기문 씨 역시 위 두 가지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정당이 무엇이 중요하겠느냐’며 공공연하게 ‘반정치주의’를 드러냈고, 출마포기선언을 하면서는 ‘나는 보수이지만 내 양심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며 스스로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한계, 우리 정치의 비극을 그대로 갖고 있는 구시대적 인물인 반기문 씨가 대선후보를 포기한 것은, 정치사적 의미에서는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타오르는 시민들의 촛불로 ‘직접정치’와 ‘토론’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촛불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정당다운 정당’으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글 : 홍성규 화성노동인권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