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피크] 한때 강경은 금강 물줄기 위에 터 잡은, 서해로부터 충남북의 깊숙한 내륙까지 연결하는 목이기에 항상 사람이 밀려들었고,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포구 시장으로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로 손꼽혔던 곳이다.
이곳에 철길이 놓인 것은 1911년이었고, 연이어 대전-연산 간(7월), 연산-강경 간 철도(11월)가 개통되었다. 이듬해 3월에는 강경-군산을 잇는 군산선이 개통되어 그해 가을 이리-김제 간 철도까지 연결되었다. 이는 부강-군산 간의 철도망이 부강-강경-군산을 경유하는 금강 뱃길과 나란히 놓이게 되었다는, 철도가 뱃길을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때부터 일제가 강경을 수탈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강경의 풍경은 급속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6년에 일본 상인 1명이 정주하기 시작하더니 1909년에는 870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게 되었다. 1930년대 초 강경 인구 조사를 보면 조선인이 11,000명, 일본인이 1,458명, 중국인이 239명이다.
자연이 제공한 물길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발전했던 강경은 근대 기계 문명의 최첨단 산물인 철도가 들어오면서부터 전근대와의 결별하고 일제에 의해 ‘근대의 이식’을 시작한 것이다. 충남에서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오고, 강경읍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화력발전소가 (강경의) 대흥동에 건설되고, 호남 지방에서 가장 먼저 강경 극장이 세워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강경 포구에 위치한 서창동・염천동 일대에 군산을 통해 들어온 공산품을 보관하는 대형 창고를 가진 일본인들이 거주하였고, 이들은 의류, 음식점, 생활필수품 등을 파는 상회를 열었다. 또 홍교동, 중앙동에는 소매상을 겸한 도매상을 하는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해 지금도 홍교리, 중앙리에는 당시 지어진 건축물이 다수 남아 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 해방은 강경의 몰락을 가져왔다. 해방 이후 미곡 반출이 중단되면서 그 영화의 빛이 급속하게 사라져갔다. 상권은 크게 축소되었다. 더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시가지의 70퍼센트 이상이 파괴되어 강경은 폐허의 도시로 전락했고, 상인들은 인근 연무에 문을 연 육군훈련소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1990년 금강하굿둑의 완공되면서 금강은 수송과 어업의 기능을 상실한 기다란 저수지에 불과하게 되었고, 그렇게 강경은 잊힌 도시가 되었다.
강경의 숨겨진 자랑, 스승의 날 기념탑
그렇지만 한때의 영광을 추억하러 강경을 갈 필요는 없다. 근대의 자취는 비록 쇠락했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그렇지만 강경의 가치는 그 근대의 자취 뒤에 새겨진 사람들의 의지와 이야기이다.
강경읍에 들어서 경찰서 앞에서 강경천 방향으로 직진하면 도로 양옆으로 학교 두 개가 나온다. 왼쪽에 있는 것이 강경중앙초등학교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이 강경고등학교이다. 별다를 것 것 없어 보이는 그 학교에 들어서면 익숙한 기념탑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 바로 스승의 날 기념탑이다.
여기에 오기 전에는 몰랐다. 스승의 날이라는 이름은 없어도 이 갸륵한 행사가 1958년 강경여자고등학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을. 한 학년의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이 행사는 후배들에게 이어졌고, 주변에 아름다운 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1963년엔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에서 5월 24일을 ‘은사의 날’로 정해 스승의 노고를 위로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1964년에는 ‘은사의 날’을 ‘스승의 날’로 이름을 바꾸고 날짜도 5월 26일로 변경해 기념식 개최를 전국 학생들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잠시 탑 앞에서 당시 교실에서의 풍경을 상상해본다.
“얘, 너희들 소식 들었니?”
“무슨 소식?”
“국어 가르치는 김 선생님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셨대!”
“어머, 정말? 어떡하니, 김 선생님은 정말 열심이셨는데…….”
“참, 석란아! 너, 김 선생님 좋아했잖아? 그냥 있어도 돼?”
“얘는 무슨 말을 하는 거니?”
한참 왁자지껄한 소동이 지나자, 석란이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낸다.
“얘들아, 그냥 말로만 이러지 말고 우리 선생님 문병 한번 갈까?”
아이들이야 대찬성이다. 인기 좋은 선생님이고, 거기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 없나 찾던 터였기에 다들 좋아했다.
“얘들아, 그럼 그냥 문병 가는 게 아니라 요즘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공연을 보여드리는 게 어떨까? 일종의 위문 공연으로?”
까르르 웃음소리가 한참을 떠돌더니 그것 역시 찬성이다. 일은 하나씩 준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경여자고등학교 적십자단원들의 방과 후 재미와 관심으로 시작된 일은 점차 학교에 알려졌고, 같이하고 싶다는 아이들도 하나씩 늘어났다.
그러다보니 단지 김 선생님 위문뿐 아니라 이번에 퇴직을 하시는 선생님들까지 모시고 감사의 꽃다발을 드리자는 이야기로 발전했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좁은 병실에 여학생들이 우르르 모여 들자 병원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김 선생님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퇴직을 하신 선생님들도 ‘이놈들이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그러나?’ 하는 호기심과 기대가 섞인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윤석란이 왜 이렇게 모이게 되었는지를 대표로 이야기하고, 몇몇 여학생이 꽃다발을 전달해드리자 선생님들의 얼굴은 점차 감격으로 물들어갔다. 주변에 모여 있던 환자들과 간호사들도 그 모습을 보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박수 소리가 진정되자 아이들은 준비한 악기를 꺼내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주에 맞춰 여학생들이 합창에 들어갔다.
수레의 두 바퀴를 부모라 치면
이끌어 주시는 분 우리 선생님
그 수고 무엇으로 덜어드리랴
그 은혜 두고두고 어찌 잊으랴
스승의 가르침은 마음의 등대
스승의 보살핌은 사랑의 손길
가냘프고 울림이 좋은 소리가 병실과 병원의 복도를 조용히 채웠다. 사람들은 조용해졌고, 서툴지만 아름다운 음악과 노래에 빠져들었다.
노래와 연주가 끝나자 선생님들의 얼굴에는 눈물과 미소가, 주변의 사람들의 얼굴에는 감탄과 즐거운 웃음이, 아이들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그려졌다.
상상만으로 절로 뿌듯함이 새겨진다.
1965년에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로 변경되어 각 학교에서 개최되던 스승의 날은 1973년 정부의 서정쇄신방침에 따라 사은행사를 규제하게 되어 폐지되었다가, 1982년 스승을 공경하는 풍토 조성을 위해 다시 부활되었다. 지금 강경고등학교에 있는 ‘스승의 날 기념탑’은 지난 2000년 청소년적십자단원들이 최초로 스승을 위문했던 당시 강경여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리고 1936년에 문을 연 강경공립실과여학교는 1943년에 강경공립고등여학교, 1946년에 고급여자중학교, 1951년에 강경여자중고등학교, 1991년에 강경고등학교로 시대의 요구에 따라 그 명칭과 교육을 달리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최초 신사참배 거부 선도기념비
강경고등학교 앞에는 좀 더 깔끔한 모양새를 한 강경중앙초등학교가 서 있다.
초등학생이라 하면 세상 물정도 모르는 꼬맹이라 생각하겠지만, 식민지 조선의 아이들은 그 여물기가 어른 못지않았다. 게다가 금강과 서해의 물길과 그 짭짜름한 젓갈, 일본인이 설쳐대는 악다구니에서 배움을 놓치지 않았던 중앙초등학교(당시 강경공립보통학교)의 아이들은 누나와 오빠들에 비해 더욱 단단한 일을 만들어낸다.
때는 1924년 10월이었다.
강경공립보통학교에서는 옥녀봉에 새롭게 만든 신사를 참배하기로 계획했다. 신사란 무엇인가?
신사(神社)는 일본의 민속신앙인 신토 신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종교시설에서 출발해 천황(天皇)의 조상이나 일본의 국가유공자를 안치한 건물로,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에게는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후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표방하며 신사를 곳곳에 설치해 참배를 강요했다.
그런데 당일 아침이 되자 보통학교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김복희 교사의 인솔 하에 참배하기로 한 학생 중 교회에 나가는 26명이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행사에 참석한 학생 중 40여 명도 참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학교 측은 해당 교사와 학생들을 하나하나 불러 참배 거부가 잘못임을 인정하라 요구하고, 그러지 않으면 교사는 면직시키고 학생들은 퇴학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일부 학생들은 여기에 굴복해 거부를 철회하고 퇴학을 면했지만 김복희 교사와 다수의 학생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총독부에 보고되었고, 학무국장까지 내려와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문제가 커지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독신문』 등에 보도되었고, 이로 인해 신사참배 강요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다른 지역과 학교에서도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일제로서는 통탄할 일이고, 우리로서는 더 이상 기꺼울 수 없는 최초의 신사참배 거부가 이 단정하고 조그만 학교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 자랑스러운 사건은 차츰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갔지만, 2000년 강경성결교회에 신영춘 목사가 부임하면서 이를 조명하기 위한 노력들이 행해졌다. 당시 참배를 거부했던 이들이 대부분 강경성결교회의 신도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2006년 9월에 최초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기념하는 4미터 높이의 조형물이 강경성결교회에 세워지게 되었다. 조형물의 전면에는 김복희 교사 및 학생들의 모습이, 뒷면에는 이 사건이 처음으로 보도된 1924년 12월 『활천』의 기사를 새겼다.
강경에는 정말 다채로운 풍경이 있다. 근대의 화려했단 자취부터, 억센 저항의 흔적과 숭고한 종교의 당당함 그리고 사계 김장생과 그 제자의 이야기가 담긴 서원까지 조선부터 근대까지 가장 굵직한 이야기들이 새겨져 있는 곳이 바로 강경이다. 그렇지만 그 초입의 학교에서 만난 기념비는 이런 다채로운 풍경이 바로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해준다.
[여행노트] 지난 10년간의 지역 스토리텔링의 경험과 기록을 모아 지역의 이야기를 새롭게 정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