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과 삶이 흐르다 잠시 쉬는 곳,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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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과 삶이 흐르다 잠시 쉬는 곳, 주막
  • 이철호 기자
  • 승인 2012.0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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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와 막걸리의 권토중래, 첫 번째 이야기

술잔 안으로의 여행, 전통주와 막걸리의 권토중래

잘 빚은 청주 한잔에 예를 갖추고 투박한 막걸리 잔 부딪히며 격을 허문다.
“술, 너는 무엇인가?” 묻노니 “나는 역사이자 삶이다!”라고 답한다.

우리를 울리고 웃겼던 술,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막걸리, 반가운 이를 기다리며 100일을 익혔던 전통주, 세뱃돈 대신 내어주던 맑은 청주 한 잔.

우리의 술은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 했던 오래된 벗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뿌리와 같던 술은 만들 수도 마실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 일상에서 멀어져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찾지만 비슷비슷하게 만들어진 것들뿐이니, 근본이 없는 술자리는 절제를 잃어버려 방종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영영 자취를 감추었을 것만 같았던 우리네 술들이 잔잔한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오고 있다.

이 바람을 잠시 스쳐 지나는 바람일지, 언제나 우리 곁은 지키는 향기로운 따뜻함이 될지는 바람의 탓이 아니라, 빗고 즐기는 우리의 몫이라 하겠다. 과연 우리가 제몫을 할 지 그 알딸딸한 궁금증을 풀러 몽롱한 따뜻함이 있는 곳들을 찾아본다. [편집자 주]

 

“주모 여기 술 한 상 주쇼.”
먼 길을 가던 길손이 봇짐을 풀며 대청마루에 걸터앉는다. 주모는 이내 막걸리 한 병과 반찬 몇 가지를 안주삼아 상에 담아 손님 앞에 놓는다. 길손은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는 “캬, 좋다!”하는 탄성과 함께 여독을 풀어놓는다. 막걸리 한 병에 배도 든든해진다.

TV사극에서 흔히 보는 장면이다.
오래전 주막은 길손의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우고, 쉴 곳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여행이 걷는 것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이면 어디든 주막이 있었다.

그 많던 주막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16년에 ‘음식점과 양조업을 겸할 수 없다’는 주세령이 발령되면서 부터다.

본래 막걸리는 판매 목적보다는 자가 소비를 위해 만든 술이었다. 형편이 닿는 집에서는 명절이 가까워지면 막걸리를 만들어놓고 손님들을 맞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주막의 경우도 주모가 만든 막걸리를 손님에게 내어놓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막걸리를 만들 수 없게 되자 주막에서는 국밥 말고는 팔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기차 등 빠른 교통수단이 등장하면서 괴나리봇짐에 몇 켤레의 짚신을 메고 여행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차츰 사라져갔다. 그렇게 우리 풍습의 하나가 사라져갔다. 그렇게 자취를 지워나가면 결국 우리의 문화와 역사마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나마 경상북도 예천의 삼강주막과 문경의 영순주막은 가장 최근까지 남아 있던 주막이며, 우리 술 문화와 여행의 자취이다.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삼강주막은 천삼백 리 낙동강 물길과 내성천, 금천이 만나는 나루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원래 그 자리에는 1900년대에 지은 보부상과 사공의 숙소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삼강은 한양으로 가는 길목인데다, 언제나 보부상과 길손이 끊이지 않았고, 장날이면 나룻배가 30여 차례나 오갈만큼 분주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1934년 대홍수로 인해 보부상과 사공의 숙소 건물들이 다 사라져버렸고, 그 자리에는 삼강주막만 남아 100년 넘는 시간을 지켜왔다. 그리고 2005년 주막의 2대 주인이자 ‘낙동강의 마지막 주모’로 불리던 유옥연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이곳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져갔다. 

이곳에 다시 사람의 관심이 모이고, 발길이 들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삼강리 주민들은 녹색농촌체험마을회를 꾸려 2007년에 경상북도로부터 녹색농촌마을로 지정받았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마을 어른들의 증언을 토대로 사공과 보부상의 숙소도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마을 주민들이 돌아가며 막걸리와 다양한 먹거리를 판매하고,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주막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는 단지 주막 한 채가 복원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추억과 문화가 되살아나는 것이고, 우리의 여행이 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이제 주말이면 옛 정취가 그리운 길손들이 대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하나 둘 주막으로 들어선다. 주막을 지키듯 서있는 450년 된 회화나무는 다시 찾아온 손님이 반가운 듯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사람들은 그늘 아래 막걸리 잔을 받아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옛 모습이 반가운 이들은 툇마루며 벽에 이런 저런 글귀를 남기면 추억 하나를 만든다.

아직 이곳을 거쳐 갔던 이들의 추억이 새겨지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이렇듯 주막의 처마에서 부모와 함께했던 아이들이 나중에 이곳에 목을 축이러 들릴 때면 많은 추억과 자취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삼강리의 삼강주막 말고도 문경시 고모산성 자락에는 또 하나의 삼강주막이 있다. 지난 2005년 문경시가 문경의 영순주막과 예천의 삼강주막의 모습을 옮겨와 주막터가 발견된 고모산성의 진남문 안쪽에 ‘돌고개 주막거리’를 조성한 것이다.

천하장사인 고모노구와 마고노구가 경쟁하여 하룻밤 만에 쌓았다는 전설이 있는 고모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벽으로 길이 1,646미터의 작은 성이지만 좌우 통로가 아래로 내려다보이고 영강이 앞을 가로 막아 천혜의 요새다. 그 험한 산세 때문에 임진왜란 때 왜군은 산성이 텅 비었음에도 꼬박 하루를 정찰한 뒤에야 군장을 풀었을 정도라고 한다.

진남문까지 가는 길은 고모산 자락에 있는 마을 신현리를 지나쳐 주차장까지 들어가는 것과 고모산 아래에 있는 진남휴게소에서 옛길을 따라 걷는 방법이 있다.

옛길을 따라 걷다보면 영강 절벽에 토끼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아슬아슬하다는 ‘토끼비리(토천兎遷)’라는 험한 벼랑길을 만나게 된다. 이 이름이 생긴 것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려 태조 10년(927년)에 견훤이 지금의 산양인 금품성을 빼앗고 경주로 가려하자 신라 경애왕이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태조 왕건은 기병 5000명을 보내 견훤을 추격하기 시작했지만 고모산성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었다. 그때 토끼 한 마리가 바위절벽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고 “토끼가 가는데 우리가 못 가겠는가.”하며 이 길을 통과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토끼비리를 지나 진남문 안으로 들어서면 두 채의 초가집이 나오는데 왼쪽이 문경의 영순주막, 오른쪽이 예천의 삼강주막을 모델로 지은 것이다.

지난 길이 험하기에 고개마루에서 만난 주막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우리의 술이라는 게 길과 논과 밭의 어려움을 씻겨주던 한줄기의 생명수와 같던 게 아니었던가.

그러나 2010년 여름, 산성과 어우러진 옛 주막의 풍경을 기대하며 싸리문을 열었지만 처마에는 곰팡이가 슬고 지붕도 썩어서 시커멓게 변해버려 흉물스런 천막이 덮여져 있었다. 막걸리 열풍이 불면서 문경시가 5억 원이나 들여 주막을 복원했지만 부실공사로 인해 준공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천정에서 물이 새더니 결국 문을 닫고 을씨년스런 풍경만 남았다.

과함을 결코 자연스러움보다 못하다는 것은 어쩌면 술이 남긴 가장 좋은 교훈이 아닐까?
그래도 그 과함이 길을 오가는 이들의 지혜로 점차 부드러워질 날을 기대해본다.
이 길이 바로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과거 길을 가던 선비들은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지친 다리를 쉬면서 다가올 미래를 꿈꾸던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그려본다. 낯선 곳에서 모르던 이들과 하룻밤을 보내야했던 선비들은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벗이 되고 스승이 되었던 그들을.

대쪽 같은 선비라도 막걸리 한 사발에 풍류객이 되었으리라. 그 풍류의 바람이 문득 술잔을 당기는 듯하다.

짚방석(方席) 내지마라 낙엽(落葉)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희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한석봉(韓濩, 1543년~1605년, 조선의 문신·서예가)

 

삼강주막과 회화나무

경북도는 민속문화재 제134호로 지정한 삼강주막은 경상북도 예천 풍양면 삼강리 166-1에 위치하고 있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시집와 청상이 된 유옥연 할머니는 뱃가 할머니로 불리는 마지막 주모였다. 새마을사업과 함께 놓인 삼강대교는 사공과 함께 나그네의 발길도 떠나게 만들었다.
새로 복원된 주막의 뒤편으로는 시원한 나무가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학자수’ 혹은 ‘선비수’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회화나무이다. 나이는 대략 250살 정도이며, 키는 15m나 되며, 둘레는 5m나 되는 삼강주막의 터줏대감이다.

가는 길

중부내륙고속국도의 점촌나들목에서 나와 국도3호선을 타고 1km 정도 가면 문경시청이 나온다. 시청에서 경북선 점촌역 쪽으로 가면 영강이라는 작은 강이 나오고, 그 다리를 건너 의성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7km 가면 오룡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낙동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1.5km 정도 가면 삼강교가 나오는데,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삼강주막 진입로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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