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이후의 부여를 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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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이후의 부여를 가다 2
  • 윤민 기자
  • 승인 2020.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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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스토리텔링 부여 03] 홍산면의 화려했던 기억을 좇아

[뉴스피크] 

사라져가는 조선의 흔적을 붙들다, 홍산동헌

홍산현 관아. 당시의 화려함이 아직 남이 있는 듯하다.  ⓒ 뉴스피크
홍산현 관아. 당시의 화려함이 아직 남이 있는 듯하다. ⓒ 뉴스피크

날아가는 기러기를 닮았다는 비홍산(飛鴻山) 자락 아래 안온하게 자리 잡은 홍산(鴻山)현 관아. 이 앞에 서면 문지기 대신 관아를 지키고 있는 커다란 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집홍루’라 불리는 홍산 동헌의 아문(관아의 문)이다. 장뫼석에 기둥을 박아세운 누각은 2층 건물 위로 팔작지붕이 유려하게 뻗어 관아의 위엄을 세운다.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르면 동헌 앞으로 뻗어 나온 큰길을 중심으로 홍산읍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높지 않은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 선 홍산의 중심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은 오래전 홍산을 뒤흔들었던 반란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몽학은 바로 이곳 홍산 동헌에 사람들을 모아 세상을 움직이고자 했다. 부당한 삶을 올바로 되돌리고자 들고 일어난 서민들의 봉기인가, 하급 관리에 머무는 자신의 삶을 넘어 권세를 쥐고자 조정에 맞선 역모인가. 그 평가가 엇갈리긴 하지만 이곳이 천여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모여 뜻을 함께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당시 이 일대를 아우르며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관아는 이제 거느리던 20여 동의 건물들을 다 잃고 관아문과 동헌 건물, 향방청, 객사 정도만 남아 그 역사를 다시 기억하게 한다. 

홍산 동헌의 아문이었던 집홍루.  ⓒ 뉴스피크
홍산 동헌의 아문이었던 집홍루. ⓒ 뉴스피크

안쪽으로는 잔디가 깔린 너른 마당 너머로 동헌 건물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의 고을을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8개 도로 나누고, 8도 아래 330여 고을을 크기에 따라 부, 목, 군, 현으로 나누었다. 고을의 크기에 따라 관리를 파견할 때도 직급을 달리했고, 작은 단위의 현에는 현감(종6품)이, 큰 규모의 현에는 현령(종5품)이 파견되었다. 그들이 일하던 사무소가 바로 관아로, 당시 홍산현의 집무소가 이 홍산동헌이었다. 

지금의 동헌은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후 고종 8년, 즉 1871년 관청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전국에 걸쳐 관청 건물을 지어 정비할 때 건립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10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기능을 상실했는데, 홍산현 관아는  일제강점기 이후 홍산지서로 사용되다가, 1984년에 부여군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했으며,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곱 칸으로 구성된 제법 큰 건물인 동헌 건물 편액엔 ‘제금당’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제금(製錦)‘이란 ’어진 이가 현령의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다. 나무를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다 쓴 듯 대들보들이 줄 맞춰 서지 못하고 비뚤배뚤하지만 여전한 모습으로 지붕을 떠받들고 있다. 제멋대로 뻗은 들보들이 풍겨내는 시간의 향기와 파격을 품은 조화로움은 건물 전체를 생동감 넘치게 한다. 

동헌 옆으로는 ㄷ자형으로 지은 제법 멋들어진 건물이 한 채 딸려 있다. 이방, 호방, 형방 등 당시 홍산현의 실무를 직접 맡아보던 아전들이 근무하던 향방청이다. 드나드는 백성들로 늘 북적였을 텐데 지금은 쓸쓸히 바람을 맞으며 사람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다. 

홍산동헌의 제금당.  ⓒ 뉴스피크
홍산동헌의 제금당. ⓒ 뉴스피크

해방 이후 그 원형을 제대로 찾아볼 수 있는 관아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문화재청은 이 문제를 인식해 조사를 나섰고, 그 결과 나주, 제주, 김제, 고창과 거제 등과 함께 부여 홍산현 관아까지 6곳이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자취를 감출 뻔한 관아 유적이 조선시대 지방 행정과 건축 양식 등을 경험하게 해주고 관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옛 도시 공간을 기억하는 답사지가 되고 있다. 바로 옛 시가지의 원형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춘 거리에서 근현대의 삶을 만나다, 홍산 동헌로

홍산시장에서 만난 근대 건축물. 아직 남아 있을까? ⓒ 뉴스피크
홍산시장에서 만난 근대 건축물. 아직 남아 있을까? ⓒ 뉴스피크

동헌을 나서 옛 시가지의 큰길을 따라 길을 나선다. 여전히 ‘동헌로’라 불리고는 있지만 한적한 신작로에 감도는 분위기가 어딘지 쓸쓸하다. 동헌 바로 앞 왼쪽 편으로 보건소가 보이는데, 이곳에도 인적이 없는 게 이전했다는 종이 한 장만 나부낀다. 

하지만 이내 근대의 거리로 시간이동이라도 한 듯,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던 당시의 건물들이 거리 양쪽으로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느 하나 틀에 박히지 않은 개성 가득한 모습에 세월의 흔적을 켜켜이 안고 등장하는 건물들 중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오른편에 자리 잡은 딱 보기에도 ‘나 근대요’ 하는 살굿빛 말끔한 건물이다. 아니나 다를까 홍산 저포조합 건물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건물이다. 

이 아기자기한 벽돌집은 일제강점기 홍산 지역에 건립된 최초의 2층 건물로 충남지역 저포 관련 시설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내부 공간은 가정집으로 사용되면서 조금 달라졌지만 목조 계단이나 2층 목조 마루 등이 그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준다. 모시 재배지로 유명한 한산, 서천 등과 함께 모시의 집산지로 이름났던 홍산을 잊지 말라며 제 존재를 알리고 있는 듯하다. 

예전만큼 활기차진 않지만 그 독특한 화려함은 잊지 않고 있는 홍산시장이다.  ⓒ 뉴스피크
예전만큼 활기차진 않지만 그 독특한 화려함은 잊지 않고 있는 홍산시장이다. ⓒ 뉴스피크

하늘색, 붉은 갈색, 민트색, 연녹색 제각각이지만 시간의 때를 멋스럽게 두른 근대의 색들이 만들어 내는 사각형의 조합이 정겹고 또 멋스럽다. 소외되어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오히려 축복이 되어 다가온다. 요즘 어디를 가든 빈티지한 느낌을 낸다고 멀쩡한 옷을 찢고 벽들을 긁어내지만 그 짧은 시간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이 숨 쉬는 사물들이 지닌 차원이 다른 빈티지를 어찌 이길 수 있을까. 감각과 유행이 돌고 돌아 이젠 오히려 손때 묻고 뭉툭한 장소에서 감성을 깨우고 마음을 쉬고 있으니 이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찾던 바로 그 장소가 아닌가 싶다. 

시원함으로 반기는 홍산객사. ⓒ 뉴스피크
시원함으로 반기는 홍산객사. ⓒ 뉴스피크

큰길을 두 블록 내려와 우체국이 보이는 지점에서 왼편으로 꺾어 들어가면 홍산 객사로 가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양 날개를 거느린 기다란 일자형의 객사 건물이 뿜어내는 위엄에 잠시 압도되어 본다. 왕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중앙관리들이 묵으며, 국왕의 전패를 모시는 곳이라 그 크기나 위세가 동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중앙에 전패를 모신 정당을 두고 마주 달린 익실이라 부르는 양 날개는 관찰사와 수행원의 숙소로 쓰였다고 한다. 

객사 오른쪽으로는 굵은 몸통에서 뻗어 나온 잎들이 건물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수령을 한참 잡수신 듯 보이는 은행나무 어르신이 자리 잡고 계신다. 영험하신 어르신은 7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사는 동안 마을의 변고나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울거나 불빛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치성을 드리면 마을 주민의 소원도 이루어주었다고 하니 그 남다른 기풍이 겉모습만은 아니었다. 그 노고를 인정받아 ‘홍산객사 은행나무’란 이름으로 향토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잠시 후 한 가족이 들어와 은행나무 그늘에 잔디밭이 푸릇하게 깔린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친다. 엄마와 딸로 보인다. 그 옆으론 어린 아들이 자전거를 타며 마당을 한 바퀴 휘 돈다. 종종 들르는 동네 주민인 듯한데 산책하듯 자유롭게 그 공간을 누비는 모습이 참 정겹다. 

홍산객사는 이제 사람들의 친근한 공간이 되어 있다. ⓒ 뉴스피크
홍산객사는 이제 사람들의 친근한 공간이 되어 있다. ⓒ 뉴스피크

다시 동헌 쪽으로 길을 거슬러 한 블록 올라가면 ‘충남체인홍산마켙’이라는 슈퍼마켓과 ‘홍산 현대 식당’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그 사이 골목으로 들어서면 거기서부터가 홍산 시장로이다.  중부지방에서 군산, 강경 정도로 큰 시장이었다는 홍산 시장. 지금도 2일, 7일이면 장이 서고 있는 이곳은 부여에 있는 대표적인 5일장인 부여장, 홍산장, 외산장 중 부여장 다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장터이다. 이전에는 더욱 융성해 부여와 보령, 서천, 군산까지 충남 중부권 경제를 쥐고 흔들 정도였다고 하니 장꾼들로 북적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스쳐가는 듯도 하다. 

홍산시장. 한가하고, 늙었지만 그래도 정겹다. ⓒ 뉴스피크
홍산시장. 한가하고, 늙었지만 그래도 정겹다. ⓒ 뉴스피크

정식으로 개장된 것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8년으로 1960년대까지만 해도 그 위세가 대단했다고 하는데, 이후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규모가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동네장터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시를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은 그 다채롭고 은근히 내비치는 화려함으로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시장로로 들어선 뒤 열 발짝을 채 못 가 나무로 된 서까래가 가득한 2층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옆에 자리 잡은 지은 지 몇 년이 채 안 되어 보이는 현대식 건물과 대비하니 더욱 그 낯선 차림이 돋보이는 건물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맞은편 세탁소에서 아저씨 한 분이 나오시면 말을 건네신다. “그 집 사진 찍으러 오셨수?” 아저씨는 집이 독특해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에 요즘 그 집을 찍으러 멀리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며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신다. 

“여기 사진 찍으러 사람들이 많이 와요. 얼마 전에도 몇 명이나 왔다 갔어.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선 유명한가봐.”

“네, 건물이 독특해서 눈길이 가네요. 혹시 언제 지었는지 아세요?”

“100에서 150년은 족히 되얐을 걸? 이거 지을 때 이 근처에선 처음으로 2층 건물을 짓는다고 여그저그서 구경오고 했다고 해. 이게 그렇게 유명한 건물이었어.”

그렇게 건물 자랑을 잔뜩 늘어놓으신 아저씨 표정이 순간 어두워지신다. 

“근디, 조만간 여길 개발한다는 소리가 있어. 그런다고 저거도 허물어 버릴지 몰라. 없어지기 전에 빨리 찍어 둬요. 에고, 부수고 새로 지으면 다 좋은 줄 알아. 이렇게 오래된 건물을 잘 보존하면 그게 다 문화유산이 되는 것인데.” 

낡은 건물을 꾸미는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지는 홍산시장의 한 상가. ⓒ 뉴스피크
낡은 건물을 꾸미는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지는 홍산시장의 한 상가. ⓒ 뉴스피크

개발의 무자비한 손길이 아직 닿지 않은 지역, 홍산은 그 때문에 더욱 귀한 공간이 되었는데 이곳만이 간직한 보물을 아끼고 보존할 생각보다는 그저 편리한 획일화를 택하려 하니 안타까운 마음에 더욱 이 거리가 짠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다음에 올 때는 이곳의 풍경이 많이 달라졌을 듯하다. 

건물을 지나고부터 본격적으로 좌판이 벌어진다. 주로 나이 지극하신 어르신들이 거리 가장자리에 오밀조밀 무리지어 앉아 계시는데 산으로 들로 다니며 직접 캐온 나물들부터 직접 가꾼 야채들, 과일들, 곡물과 수산물까지 싱싱한 먹을거리들이 조르륵 펼쳐져 있다. 중간 중간 시장형 아케이드가 설치되어 비를 피할 수 있게 된 곳 안쪽으로는 잡화와 수산물이 주를 이룬다. 한쪽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장은 홍산장이 제일 재미져” 하고 외치신다. 옆자리 사람들이 왁자하고 웃음을 보내니, 아직 ‘장터’를 지키는 그이의 원기왕성함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장을 따라 걸어 내려오다 보면 문을 닫은 곳이 꽤 눈에 띈다. 벽돌에 막힌 건물을 자세히 살펴보니 예전에 셔터문이 있던 곳이다. 의아해하며 살피니 아저씨 한분이 다가와 거긴 이제 영업하지 않는다고 넌지시 말을 던지신다. 그러고는 맞은편 사진관을 가리키며 그곳도 이제는 문을 닫았단다. 사진관이 잇는 곳도 건물이 독특해 오래된 건물 같다며 말을 건네니, 40년쯤 되었다 하시며 이제는 집값이 계속 떨어진다고 한숨을 쉬신다. 알고 보니 건물 주인으로 아래서 포목점을 하시는 분이었다. 

아저씨는 시장을 가리키며 이제는 사는 사람보다 파는 사람이 더 많으니 더는 버티기가 쉽지 않다고, 포목점도 장사가 잘 되어서가 아니라 그저 닫아둘 수 없어서 열어 둔다고 한탄하신다. 정감 어린 옛 정취, 아름다운 유산들을 잃지 않으면서도 많은 이들이 홍산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벅참을 더욱 알리는 수밖에 없으리라.     

 

왜구를 막고, 요동을 바라보다, 홍산대첩과 태봉산성 

 

홍산관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태봉산성이 있다. 그리고 벚꽃 피는 4월이면 태봉산성과 홍산관아 일대에서 홍산대첩문화제를 개최한다. 왜구토벌에서 가장 빛나는 전적으로 알려진 최영장군의 홍산대첩을 기념하고 무명 장수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열리는 행사로 2003년부터 시작되었다.  

이제 공원으로 꾸며진 태봉산성의 정상. ⓒ 뉴스피크
이제 공원으로 꾸며진 태봉산성의 정상. ⓒ 뉴스피크

1376년 7월 서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발호하던 왜구가 금강 상류를 통해 부여를 거쳐 공주에 이르렀다. 배를 타고 남해안 바닷가 마을에 나타나 식량만 빼앗던 왜구들이 차츰 대담해져 때마침 여름이라 불어난 강물을 이용해 금강을 거슬러 오르며 충청도 내륙에까지 밀려든 것이다. 

이 왜구의 규모가 크고, 기세가 거세며, 약탈이 극성이어서 당시 지방군은 제대로 대적하지를 못하였다. 

주목사 김사혁(金斯革)이 정현(鼎峴)에서 싸우다가 패전해 공주가 함락되었고, 뒤이어 연산현(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개태사(開泰寺)에서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도 전사하였다. 

이 소식에 조정이 술렁이자, 나이 육십에 이른 최영 장군이 출정을 자청하였다. 

 “보잘것없는 왜놈이 횡포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지금 제어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도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다른 장수를 보내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군사도 평소에 훈련하지 않았으니 또한 가히 쓰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늙었으나 뜻은 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사(宗社)를 편히 하고 왕실(王室)을 방위하고자 함이오니 원컨대 빨리 부하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여 주옵소서.” 

우왕은 그가 나이가 들었다며 말렸으나, 최영은 굳이 출정하기를 거듭 요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명을 받은 장군이 휘하 부하들을 데리고 서둘러 출정하였지만 벌써 왜구는 홍산벌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군은 홍산벌이 내려다보이는 태봉산성에 진을 쳤다. 그리고 왜구들의 모습을 살피니 왜적이 먼저 험하고 좁은 곳에 웅거하고 있었다. 장군은 그들을 빨리 물리치기 위해서는 정면 돌파가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주저하는 장군과 병사를 이끌고 노장군은 앞장서서 왜구를 향해 나아갔다. 백발의 장군이 말을 몰아 달려오자, 왜구들은 당장 활로 대응을 했다. 그중 화살 하나가 장군의 입술에 박혔다. 그렇지만 장군은 말을 멈추지도 않도, 피가 흐르는 몸도 돌보지 않고 왜구의 진지로 달려들면서 자신에게 활을 쏜 왜구에게 활시위를 당겼다. 그 왜구가 장군의 화살을 막고 죽자 그제야 장군은 태연하게 자신의 입술에 박힌 화살을 뽑아냈다. 그 당당한 모습에 왜구의 기세는 떨어지고, 고려군의 사기는 한없이 높아졌다. 고려군의 함성이 홍산벌을 뒤흔들었고, 왜구는 뿔뿔히 흩어져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그 뒤 왜구들은 늘 “우리가 두려워하는 자는 백발(白髮)의 최만호(崔萬戶)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최영을 두려워하였다. 

태봉산성을 거점으로 한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은 최무선의 진포싸움,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함께 고려 말기 왜구를 크게 격파한 3대 대첩으로 꼽힌다. 당시 동북아시아는 그야말로 격변기였다. 중국에서는 유럽까지 진출했던 대제국 원이 점차 쇠퇴하면서, 홍건적과 같이 억눌려 있던 한족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무로마치 막부와 남북조시대를 거쳐 기나긴 전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를 틈타 바다에서는 주로 쓰시마 섬을 근거로 하여 해적들도 활개를 쳤던 것이다. 

자연히 고려는 위와 아래에서 치고 오는 무리들과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려의 왕과 최영 장군은 단지 달려드는 왜구를 물리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동북아시아의 변화를 주도적으로 맞이함으로써 요동의 땅을 회복하고, 자주적인 국가로 우뚝 서고 싶어 했다. 비록 그 장대한 뜻은 이루지 못하고, 고려의 마지막 장군이 되었지만 70이 넘은 노장군 최영이 세운 그 기개만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그 장군의 기개가 스며든 태봉산성은 해발 90미터의 산꼭대기에 있다. 석축으로 기단부를 쌓은 뒤 흙을 쌓아 성벽을 만들었다는데, 그 흔적이 명확하지는 않다. 지금은 체육공원으로 꾸며져 있는 정상에 오르면 홍산벌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면서 가슴이 확 트임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 평화는 움츠림으로써 얻는 게 아니라, 자신의 뜻을 지키기 위한 힘과 기개를 통해 얻은 것임을 이 작고 가파른 산성에서 확인을 한다. 

 

 

 * 홍산면 산책 코스

홍산 동헌 -> 홍산저포조합건물 -> 홍산 객사 -> 만덕교 -> 일제시대 2층 건물 -> 홍산 시장 -> 홍산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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