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충사, 궁남지 그리고 백제왕릉 : 백제의 왕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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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충사, 궁남지 그리고 백제왕릉 : 백제의 왕들을 만나다
  • 윤민 기자
  • 승인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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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스토리텔링 부여02

[뉴스피크] 

삼충사와 의자왕 이야기  

 

부소산 입구에서 만났던 삼충사에는 세 명의 충신인 성충, 홍수 그리고 계백과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사실 우리 대부분에게 방탕한 왕의 대명사로 각인되고 만 백제의 31대 왕인 의자왕은  담대한 성품에 효심이 깊고 우애가 돈독한 모범적인 왕이었다. 내외 정치에도 능해 재위 15년에 이르도록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성군으로써 나라를 이끌어 왔다. 그러나 국운이 다하였던지, 아니면 지나친 성공에 도취되었던지 재위 16년(656)의 의자왕은 강대한 군사력을 믿고 방심하며 음주가무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부소산 입구에 있는 삼충사 내부 모습. ⓒ 뉴스피크
부소산 입구에 있는 삼충사 내부 모습. ⓒ 뉴스피크

이때 좌평(佐平) 성충과 흥수는 국가의 운명을 심히 근심하여 왕께 자주 극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대왕이시여! 국사를 돌보시오. 대왕께서 탐락하시면 대 백제국의 운명이 위태롭사옵니다.” 

삼충사에 모셔진 충신 흥수. ⓒ 뉴스피크
삼충사에 모셔진 충신 흥수. ⓒ 뉴스피크

듣기에 과히 좋지 않은 권고가 그치지 않으니, 결국 왕은 노하여 성충은 옥에 가두고 흥수는 귀양을 보내버렸다. 

지극했던 성충은 옥중에서도 나라와 임금을 걱정하여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곡기를 끊었다. 몸이 점점 쇠약해진 그는 임종에 이르러 마지막 유언으로 상소를 올렸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므로 원하건대 한 말씀 더 올리고 생을 마치겠나이다. 신이 항상 시세의 변화를 관찰하는바 반드시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그 지리를 살펴 상류에 처하여 적세를 늦춰 놓은 연후에야 가히 국운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 방어한 연후에 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삼충사에 모셔진 충신 성충. ⓒ 뉴스피크
삼충사에 모셔진 충신 성충. ⓒ 뉴스피크

그러나 그의 마지막 상소도 왕은 알아 살피지 못하였다. 결국 660년 3월,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세운 13만의 당나라 군사가 백제로 향하였고, 신라 왕은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수도로 진군하게 하였다. 갑작스러운 당나라의 공격에 백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의자왕은 군신들을 급히 모아 놓고 전술의 적당한 방법을 논의하였으나 모든 신하들의 의견이 백출하여 왕도 어찌할 줄 모르게 되었다. 

이때 의자왕은 이미 억울한 죄목으로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 중인 좌평 흥수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어 방어의 계책을 물었다. 국왕의 보전과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여 충성스러운 간언을 되풀이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살이를 하던 흥수는 유배지의 고달픈 생활 중에도 나라의 장래에 대한 근심과 임금님을 사모하는 충성심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당병은 무리가 많고 군사들의 기강이 엄명한데다가 신라와 공모하여 쳐들어오므로 만약 평원이나 광야에서 대진하고 싸우면 그 승패를 알지 못하겠으나 백강과 탄현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길목이므로 여기서 한 장부가 창을 휘두르면 만 사람도 당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용사를 뽑아 여기서 지켜 당병들로 하여금 백강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엄중히 지키다가 그들의 군량이 다하고 군사들이 피로해진 연후에 분격하면 반드시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흥수의 의견은 곧 조정에 전달되었으나 일부 신하들은 말하기를 “흥수는 오래도록 귀양살이를 하는 중이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말은 가히 쓰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당병들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면 거슬리는 물에 배를 부리지 못할 것이요,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게 하면 길이 좁아서 군마를 벌려 세울 수 없겠으니 이때를 기하여 군사를 내어 몰아치면 비유컨대 울 안에 들어 있는 닭을 잡는 것과 같고 그물에서 고기를 주워내는 것과 같으리라” 하자 왕은 이 말을 수긍하였다. 

비록 이로 인해 적군이 무사히 수로와 육로를 따라 공격해왔지만, 이를 두고 의자왕이 말년에 황음무도에 빠져 충신의 간언을 배척한 무능과 분열 때문이라고 적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백제의 영웅, 계백. ⓒ 뉴스피크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백제의 영웅, 계백. ⓒ 뉴스피크

백제 귀족들의 의견이 둘로 나뉜 것은 정세의 판단과 전략 전술에 대한 각자의 관점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게 아닐까. 실제로 기벌포, 탄현이라는 요충지에 병력을 집결하여 적을 막았을 경우, 적이 이를 회피하여 다른 경로로 쳐들어올 때에 대한 방비책이 전혀 없다는 약점이 있는 전술일 수도 있으며, 의자왕이 채택했던 후자의 전술로도 충분히 신라군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 『삼국사기』에서도 드러난다. 

 

가을 7월 9일에 김유신 등이 황산(黃山)의 벌판으로 진군하자 백제의 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士卒)들은 힘이 다 빠지게 되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태종무열왕」

 

계백의 군사는 탄현을 지난 신라군을 황산벌이라는 좁고 험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먼저 차지하고 있었기에 싸울 때마다 신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어린 화랑인 관창과 반굴의 희생을 바탕으로 겨우 백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당시 백제의 군사가 5천이고, 신라군은 5만이었다. 5만의 병력이 그 10분의 1밖에 안 되는 병력을 맞아 어린 화랑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죽자 사자 싸워서야 겨우 이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의자왕이 채택했던 전술이 나쁜 전술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백제군의 숫자가 너무 적었기 때문인데, 이는 계속된 신라와의 전쟁으로 많은 군사들이 신라 방면이나 한강 방면으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그전까지의 전쟁이 변경지방부터 성을 점령해 들어오는 방식이었는데 반해, 당나라와 신라의 이번 공격은 다른 지역의 성은 무시하고 백제의 수도를 목표로 곧장 찔러 들어오는 것이었다.

지역을 방어하던 백제의 군사 대부분은 당황하고, 시기에 맞춰 전쟁터에 도착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급히 공주로 피신하고 결사항전을 외친 의자왕이 부하의 배신으로 나당연합군에 잡히면서 백제는 무너졌지만, 백제의 군사는 여전히 남아 당군을 물리치는 등 향후 치열한 백제부흥운동을 벌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신라가 가장 두려워했던 백제 왕, 신라가 고구려에 이어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백제를 가장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던 의자왕은,『삼국사기』처럼 의자왕의 황음무도하고 전횡을 휘둘러서 멸망하였다는 승자의 기록으로 우리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비록 신채호 선생 같은 이가 있어,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이종(異種, 다른 종족)을 불러 동종(同種, 같은 종족)을 멸함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임과 다를 바 없는 행위이다.’ 라고 외치지만, 남겨진 부여의 주민들은 마지막 자존심을 나라와 임금에 대한 놀라운 일편단심으로 생을 달리했던 세 충신에게 걸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지금까지, 그리고 아직까지 성충, 흥수, 그리고 계백을 아직까지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부소산 입구에 가장 먼저 삼충사를 세워놓은 이유일 듯하다. 

 

 

아름다움과 사랑의 공간, 궁남지

 

서동연꽃축제 때의 궁남지와 포룡정. ⓒ 뉴스피크
서동연꽃축제 때의 궁남지와 포룡정. ⓒ 뉴스피크

신라와 조선의 왕과는 달리 백제의 왕은 그 실체와 이야기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백제의 왕 중 좋든 좋지 않든 그나마 알려진 이가 의자왕이나 무왕일 듯하다. 부소산에서 출발한 여정은 그곳에서 의자왕을 만나고, 다시 무왕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된다. 그건 부소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궁남지가 있기 때문이다. 

정원 하면 경주의 안압지나 일본의 정원들을 떠올릴 것이다. 궁남지는 백제 왕궁의 후원으로 안압지보다 40년이나 먼저(674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정원이다. 왕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 하여 궁남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백제의 조경 기술은 삼국 가운데 가장 앞서 있었으며, 일본의 정원 문화가 탄생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전한다. 궁남지를 만들었던 백제의 건축 기술이 건너가 일본 정원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무왕 35년(634) 3월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 리에서 물을 끌어들였으며,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물 가운데에는 섬을 축조하여 방장선산에 비기었다.”

 방장선산은 도교에서 말하는 이상향으로 삼신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상징한다. 궁남지의 형태를 방장선산에 빗댄 것으로 보아 축조 당시 이 같은 형태를 통해 불로장생 기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무왕 39년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연못 동쪽으로는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 있다. 정원은 1960년대까지 자연 습지로 알려졌으며, 주민들에게는 ‘마래방죽’이라 불렸다. 그러던 이곳이 왕궁의 후원임이 알려지자 1965~1967년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와 조각과 주춧돌, 우물터가 발견되었다. 1971년에는 연못 안에 포룡정이라는 정자와 목조 다리를 조성했다. 

궁남지와 포룡정.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학생들의 놀이터이다. ⓒ 뉴스피크
궁남지와 포룡정.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학생들의 놀이터이다. ⓒ 뉴스피크

어린 시절 서동이라 불렸던 백제 무왕이 이 일대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궁남지 못가에 혼자 사는 여인이 연못 속의 용을 보고 잉태했다고 전하는데, 용은 본래 왕을 상징하는 만큼 서동이 왕가의 후손임을 알리는 설화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연못 안의 정자 이름이 포룡정이 되었다. 

그리고 서동의 이야기를 기리고자 매년 7월 연꽃이 만발할 때면 궁남지의 포룡정을 배경으로 화려한 서동연꽃축제가 개최된다. 축제 기간 동안 서동공원 연꽃단지 안에는 50여종의 천만송이 연꽃과 수많은 수생식물, 야생화가 피어 장관을 이룬다. 

특히 야간의 은은한 조명 아래 드러나는 궁남지와 연꽃을 그 어디에서 보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밤이 으슥해지면 곳곳에서 소망을 담아 띄우는 풍등도 궁남지의 하늘을 밝히는 장관이다. 비록 금년은 코로나19로 축제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여름날 저녁 은은한 황혼에 자신의 자태를 자랑하는 연꽃의 모습은 어느 때나 잔잔한 감동으로 남을 듯하다. 

축제가 아니라도 아름다운 궁남지의 연꽃. ⓒ 뉴스피크
축제가 아니라도 아름다운 궁남지의 연꽃. ⓒ 뉴스피크

 

 

아름다워 더욱 슬픈 안식처, 백제 왕릉원

 

이제 왕들의 안식처를 찾아간다. 부여 동쪽 교외(논산 방향) 능산리 야산에 자리잡은 예쁜 가슴 같이 소담스러운 7기의 고분이 있다. 사비시대(538∼660)를 열었던 백제의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다. 흔히들 왕릉하면 무령왕릉이나 경주의 대능원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수학여행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사비성과 정림사지를 만든 성왕, 전쟁의 슬픔을 간직한 창왕 등 웅진천도 이후 백제 왕들의 격정적인 이야기는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그들의 이야기와 흔적을 추억하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왕릉원이고, 첫눈이 내릴 때 궁남지와 함께 부여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첫 눈이 내린 날 백제왕릉원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된다. ⓒ 뉴스피크
첫 눈이 내린 날 백제왕릉원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된다. ⓒ 뉴스피크

고분으로 가는 길은 잘 조성되어 있다. 산책로와 같은 길을 따라 걸으면 좋은 동네의 한가롭고, 여유로운 공원을 거닐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될 정도이다. 여름에는 시원해 보이는 잔디로, 겨울에는 포근해 보이는 눈으로 치장을 하는 이 넓은 잔디광장에서는 다양한 행사들도 펼쳐진다는데, 아이와 어른 누구라도 한번 뛰놀고 싶은 느낌이 드는 시원한 곳이다. 

잔디밭을 지나면 언덕과 그 위의 부드러운 선으로 중첩된 고분군들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주변의 단정함 보다 더욱 눈을 잡아끄는 것은 고분들이 만들어주는 부드러운 곡선이라 하겠다. 경주의 대능원에서 보았던 웅장함과는 다른, 소박하지만 더욱 날렵한 곡선과 가까움이 그곳에 있다. 누군가 '백제의 곡선'이라 말했던가. 

백제의 항아리, 아니면 백제의 기와나 석탑이나 향로에서 만났던 드러나지 않는 화려함을 간직한 곡선과 미려함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신라고분처럼 거대하지는 않지만, 백제의 왕릉은 좀 더 친근하고, 아름답다. ⓒ 뉴스피크
신라고분처럼 거대하지는 않지만, 백제의 왕릉은 좀 더 친근하고, 아름답다. ⓒ 뉴스피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식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분의 제일 위쪽까지 올라가면 7기의 고분과 함께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고분을 처음 발굴했던 것은 일제강점기였지만, “관아동십리허유왕릉 官衙東十里許有王陵 관아 동쪽 10리에 왕릉이 있다.”는 공주읍지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일찍부터 백제의 왕릉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려짐은 원치 않는 손까지 초대하는 법이니, 안타깝게도 발굴이 된 시점에 모든 고분이 도굴된 후였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백제왕릉원에는 7기의 고분이 있다. ⓒ 뉴스피크
백제왕릉원에는 7기의 고분이 있다. ⓒ 뉴스피크

고분을 내려오면 모형전시관과 능사리 절터로 가는 길을 만나는데, 그 길의 중간에 의자왕의 그의 맏아들 융의 가묘를 만나게 된다. 사비시대의 왕 중 가장 활달하고, 용맹했던 백제 의자왕은 나당연합군과 부하의 배신으로 당나라에 압송된 후 4개월 만에 병사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당나라는 의자왕 묘소에 비석을 세웠고, 당나라 수도였던 낙양 시는 부여군과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부여 융 묘지석 복제품을 기증하였다. 

부여에서는 1995년부터 당나라 북망산에 묻혔다고 전해지는 의자왕의 묘를 찾아 현지 조사를 벌인 뒤, 의자왕의 묘로 추정되는 북망산의 흙을 고란사에 봉안하였다가 이곳에 능을 마련하였다. 부드러운 곡선과 시원한 풍경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분들에 비해 한쪽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의자왕의 가묘는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주변의 아름다움에 그 무덤과 생애 그리고 사연에 대한 애틋함이 더욱 커진다. 

백제왕릉원에 모셔진 의자왕의 가묘. ⓒ 뉴스피크
백제왕릉원에 모셔진 의자왕의 가묘. ⓒ 뉴스피크

의자왕의 가묘를 지나면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사리감이 출토된 능산리 사지와 백제고분의 모형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능산리 동하총은 사신도가 그려진 벽화로 유명한데, 현재는 그 보전을 위하여 옆쪽으로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두고 있는 것이다. 

잘 다져놓은 듯한 능산리 절터와 그 위로 부드럽고, 완고하게 쌓여 있는 부여나성의 흔적을 보며 입구를 향하면 자연스럽게 길은 전시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전시관에서 우리는 백제를 다시 보게 된다. 고분에 잠들어 있는 왕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나기 때문이다. 

허전해 보이는 왕릉은 묘한 침묵과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소담스러운 선과 풍경으로 백제를 알려준다. ⓒ 뉴스피크
허전해 보이는 왕릉은 묘한 침묵과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소담스러운 선과 풍경으로 백제를 알려준다. ⓒ 뉴스피크

 

[전설] 서동요와 무왕의 전설 

 

옛날 연못 인근에 얼굴이 아름답고, 마음씨가 고왔던 젊은 과부가 살았다. 

달빛 어스레한 어느 봄날이었다. 한밤중에 자주빛 옷을 입은 젊은이가 소리 없이 그 과부의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놀란 과부는 소리를 질렀어야 했지만, 친근하고, 인자한 미소에 꿈을 꾸듯 같이 밤을 보내게 되었다. 

​새벽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젊은이는 그날 이후로 밤마다 그 과부를 찾아왔다. 과부는 일이 이렇게 된 게 이상도 하지만, 같이 보낸 사랑만큼 배가 불러오니 걱정이 아니될 수 없었다. 마침내 과부는 친정아버지에게 지금까지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고, 그의 아버지는 좋은 꾀를 알려주었다. 

“실을 바늘에 길게 꿰어두었다가 오늘 밤 젊은이가 오거든 그 바늘을 그 젊은이의 옷자락에 꼽아 놓아라.”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젊은이는 과부의 방을 찾았고, 젊은 과부는 아버지가 일어준 대로 몰래 젊은이의 옷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았다. ​그런데 옷에 바늘이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젊은이가 놀라 잠에서 깨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놀란 과부는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이 되자마자 길게 이어진 실을 따라 길을 나섰다. 

​그랬더니 실은 방죽 안 물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과부가 그 실을 슬슬 잡아당기자 잠시 팽팽해지더니 큰 어룡이 허리에 바늘이 꽂혀 끌려나오는 게 아닌가. 

과부는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 말 못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되었다. 아이가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도 지극할 뿐만 아니라. 낮에 부지런히 마를 캐어 파니 동네 사람들이 ‘마를 캐는 아이’라 하여 ‘마동’, 혹은 ‘서동’(薯童)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서동이 자라 젊은 청년이 되었다. 서동이 어느 날 소문을 들으니,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빼어나게 아름답다(美艶無雙)는 것이었다. ​서동은 짐을 꾸려 서라벌로 몰래 들어갔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면서 친해진 후 아이들에게 한 가지 동요를 가르쳐 주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려(嫁)두고

 마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라벌에 널리 퍼져 대궐에까지 들리게 되므로, 임금을 비롯한 백관(百官)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임금은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다. 

선화공주가 귀양 터에 다다르게 될 즈음 기다리고 있던 서동이 나타났다. 서동은 공주에게 절하며 함께 하기를 모시기를 청하니, 공주는 그가 어딘지 모르게 믿음직하게 보여 이를 허락하였다. 공주는 서동을 따라 백제로 오게 되고, 그때서야 동요가 불린 연유를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익히 알듯이 서동은 백제의 무왕이었다.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온 무왕은 그의 아름다운 아내를 위해 거대한 연못을 만드니 그곳이 지금의 궁남지라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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