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과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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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과 민중
  • 범상 스님(6.15경기본부 홍보위원)
  • 승인 2012.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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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범상 스님(6.15경기본부 홍보위원)
범상 스님(6.15경기본부 홍보위원) ⓒ 뉴스피크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말은 국가가 자랑스럽기 때문에 거기에 속한 개인(국민)역시 자랑스럽다는 뜻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국가주의 교육의 산물로서 개인은 국가(기득권)에 무조건 충성해야 한다는 무언의 강요가 내포되어 있다.

남북통일에서 모든 잘못의 책임이 상대에게 있다는 논리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하겠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은 엄연히 주권국가이다. 쉽게 말하면 현재 상태에서의 통일이란 북한의 김정은이 권력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남한의 기득권세력들이 권력을 내줄 것인가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앞서 현재 상태라고 한 것은 인민들에게 고통을 강요하면서도 국제사회 즉,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와 맞서는 북한의 미사일실험이나, 통일에 대한 정상적인 논의조차도 ‘종북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민족의 미래를 미국에게 맡겨야 한다는 남한의 수구세력들이 지키려는 기득권을 말한다.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남북 모두 민중들의 바람 일뿐, 결코 지배 권력의 소원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많은 민중들은 남북이 대등한 관계에서의 화합과 상생의 통일이 아니라 지배적 위치에서의 일방적 흡수를 통일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왜 지배 권력은 자신들이 원하지도 않는 통일을 민중들에게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가르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통치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통일은 누가 보아도 정당성이 보장되는 민족의 최대과제이다. 따라서 통일이라는 정당한 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반공(적화)은 유교가 강요했던 충(忠)과 같은 지고 지대한 이념이 되며, 그것은 국민들을 통제하는 준거가 된다.

반공(적화)과 충이 같은 목적으로 쓰이는 동안은 통일은 고사하고 민주주의조차 이루기 어렵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에게 강요되어온 충이라는 개념은 민주주의라는 입장에서 다시 정립해야 한다.

호국불교와 이순신 장군의 예를 들어 위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조선은 억불숭유의 유교적 이념을 표방한 나라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지배집단은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산ㆍ사명 등이 일으킨 승병은 호국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일본에 의해 유린되는 민중을 구하고자하는 애민으로서 평화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역시 충이 아니라 애민의 발로였다. 그런데 지배자들은 ‘백의종군’을 충의 극치로 가르쳐 왔다. 임금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고, 왕과 조정 대신들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살 궁리를 하느라 목숨 걸고 싸움하는 장수를 죄인으로 가두어 죽음직전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시 풀어주면서 싸움을 하라는 것이 백의종군 즉, 임금(지배계급)은 어떻게 살더라도 너희들은 따지지 말고 무조건 나라를 위해 충성하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멀어 위기를 자초했던 무리들은 또다시 명나라 끌어들여 백성들에게 이중고통을 안겨주었으면서도 망해가는 나라를 다시 세워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더욱 지극히 섬겨야 한다며 사대를 강화했고, 선조는 전쟁에서 승리한 군주로 추앙했다.

살펴보았듯이 국민 모두가 왕이 될 수 없듯이 국가란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로 나누어 질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강요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긍지 속에 숨겨져 있는 지배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야 말로 통일을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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