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가내로 안 준 정부와 근사하게 안 주려는 정부
* 글 : 노민호 (사)자치분권연구소 시민교육원장(사학명문 노민호아카데미 원장)
[노민호의 자치(自治)통찰=뉴스피크] 정부가 미래대응기금을 설치하겠다 한다. 반도체 호황으로 발생하는 초과세수를 기금으로 묶어서, 일종의 미래 대비형 쌈짓돈을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국가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대응기금을 만든다는 발상 자체는 탓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결과다. 실제 이렇게 되면 '막무가내로 보통교부세를 안 준 윤석열 정부'와 '근사한 명분으로 보통교부세를 안 주려는 이재명 정부'는 같은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중앙정부는 내국세의 19.24%를 지방교부세로 떼어 놓는다. 그중 97%가 보통교부세로, 전체 지방정부에 일정한 기준에 따라 배분된다. 사용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채 내려오는 돈이라, 지방정부 입장에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재원이다.
그런데 초과세수를 이 기금에 넣으면 그 돈은 교부세 대상에서 빠진다. 지금까지는 세금이 예상보다 더 걷히면 그 초과분이 보통교부세 정산을 거쳐 이듬해 지방으로 내려왔는데, 그 길목을 기금이 가로채는 것이다.
그냥 막무가내로 안 준 정부와, 근사하게 명분을 대면서 안 주는 정부가 뭐가 다른가? 물론 초과분만 빠지니 나머지 보통교부세는 평년처럼 갈 거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럼 묻자. 얼마까지가 초과인지 누가 정하나? 재정당국이 초과라고 우기면 지방은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그 기준이라는 10년 추세선은 2023년, 2024년의 대규모 세수 결손을 고스란히 깔고 그려진다. 결손의 해가 기준선을 끌어내리면 웬만큼 걷혀도 죄다 '초과'가 되는 착시가 생긴다.
우리나라 기획재정부는 세수추계에 관한 한 거의 바보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때는 돈이 없어서 전 국민 재난지원금 못 준다고 우기던 사람들이,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니까 초과세수 53조 원을 찾아내 갖다 바쳤다. 잊었나? 이런 사람들이 내년에 얼마가 더 걷힌다, 안 걷힌다 말하면 그걸 어떻게 믿나? 흔들리는 저울에서 무슨 신뢰가 나오겠나?
그러니까 이런 기금 설치에 대한 뒷담화가 나올 수밖에 없다. 대놓고는 말 못 해도, 보통교부세에 목매는 단체장들이 구시렁 안 거릴 것 같나?
뒷담화의 내용은 뻔하다. "결국 우리 몫 가져다 중앙 금고 채우겠다는 거 아니냐"는 거다. 그런데 왜 대놓고 말을 못하나. 교부세 산정의 칼자루를 중앙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 칼자루 앞에 줄을 서야 하는 단체장이 마이크 잡고 정부 기금을 비판하기는 어렵다. 침묵을 동의로 읽으면 안된다. 조용하다고 승복한 게 아니다. 속이 부글부글해도 말을 못 하는 거다.
나는 이 정부에 기대가 있어서 더 답답하다. 지난 수십 년 감세정책의 청구서는 늘 지방으로 날아왔다. 중앙이 생색내며 깎아주고, 구멍은 지방 곳간에 났다. 이 못된 관행에 매듭을 지을 수 있는 건 지방살림을 아는 이재명 정부뿐이라고 믿었다. 그런 정부가 하필 첫 단추로 지방 몫의 초과세수를 중앙 주머니에 넣는 선례부터 만들겠다니, 이게 될 말인가.
윤석열 정부가 막무가내로 안 줬을 때 나는 과격하게 비난을 퍼부었다. 명분이 근사해지면 결과도 근사해지는 게 아니다.
답은 복잡하지 않다. 초과세수는 가던 길로 보내라. 보통교부세 정산은 중앙의 선심이 아니라 법이 정한 약속이다. 미래대응기금이 정말 필요하다면, 지방 몫을 슬쩍 덜어서 채울 게 아니라 지방과 마주 앉아 재원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 얼마부터가 초과인지, 누가 판정하는지, 국회와 지방이 어떻게 견제하는지를 정해야 한다. 이게 아니면 미래 대비가 아니라 그냥 쌈짓돈이다.
지방의 오늘을 빼다가 채운 미래는 미래가 아니다. 가뭄에 단비를 막아 놓고 저수지 자랑을 하면, 논에서 보기엔 그게 가뭄이다.
* 글 : 노민호 (사)자치분권연구소 시민교육원장(사학명문 노민호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