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만화’ 아닌 ‘만와’ 김윤진 평론가의 여정
[뉴스피크]
시각 예술을 전공하긴 했지만 대중문화에 관심이 되게 많거든요.
아무래도 만화는 현실적인 이슈를 빠르게 반영하는 매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 것들에 반영되어 있는 사회적인 현상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지난 11월 1일 ‘2024 만화의 날’에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과 오늘의 만화상 시상식이 함께 개최되었다. 이는 만화와 만화평론이 마치 마차의 두 바퀴처럼 함께 굴러가야 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거대화되고, 세계를 향해 그 존재를 과시하는 웹툰의 폭발적인 작가와 작품에 비해 평론의 목소리는 아직 작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한쪽 바퀴가 작아지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새롭게 만화평론의 바퀴 축이 될 수 있는 평론가들의 등장은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다. 그 소중한 몇 편의 평론 중 대상을 수상한 ‘만화 아닌 만와’의 김윤진 평론가를 만나보았다.
김윤진 평론가를 만나기 위해 홍대입구역 근처 마포 출판문화진흥센터을 찾았다. 최근 일인출판사를 차리고, 그곳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이름은 ‘토푸’라고 영어로 tofu인데요. 이게 두부라는 뜻이긴 한데, 컴퓨터에 글꼴 파일이 없으면 가끔 글꼴이 깨져 네모 박스가 나타나잖아요. 그걸 ‘토푸’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약간 그런 것도 재밌고, 기존의 어떤 관점으로 좀 표현되지 못하는 것들을 담아내자고 그렇게 이름을 정하게 됐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출판사를 차리는 이유는 자기만의 책을 내고 싶은 것 때문이고, 이름 역시 그 욕망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그곳은 기존과 다른, 고정화되지 않은 것을 사랑하고자 하는 평론가의 욕망이 자라고 있는 곳인 셈이다. 그래서 평론은 ‘만화’가 아닌 ‘만와’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김윤진 평론가는 스스로 만화의 토양에서 자라지는 않았다고 한다. 비록 이말년 등 독특한 만화에 심취했었고, 좋아하는 작품을 위해 만화평론을 썼지만 학부에서는 경제학을,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전공해 20세기부터 21세기 초까지의 예술 생산 방식이 변화한 것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최근에 졸업을 했다. 그리고 시각예술과 영화 평론으로 먼저 등단을 하였고, 현재 영화평론가협회 출판 간사를 맡고 있기도 하다.
경제학에서 현대미술로, 거기서 다시 영화를 넘어 만화에까지 찾아가는 여정, 결국 사회에 발을 딛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예술의 각 분야로 넘나드는 방식이 제법 독특해 보인다.
“사실 제가 만화에 대해서 막 지식이 해박하지는 않고요. 이번 공모전에 참여한 계기가 만화 평론을 쓰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되게 좋아하는 만화가 있었어요. <급양만와>라는 만화인데 인스타그램에서 연재를 하시거든요. 그 만화를 평소에 재밌게 보고 또 뭔가 이 만화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런 만화평론을 이제 다뤄줄 만한 매체를 좀 찾다 공모전을 알게 됐고 그래서 참가하게 된 거죠.”
시각예술과 영화평론가들이 만화평론을 하는 일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최근 만화와 웹툰 전공자들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사회에 발을 딛고 있는 예술의 넘나듦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가장 대중적이며 친근한 만화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다채로운 시선을 만드는 건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만화 아닌 만와’의 이야기도 그렇게 시작이 된 것이다.
‘급양만와의 그림체에는 작가의 고유성이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일종의 그림체 없는 그림인 그의 만와는 마치 그림판을 이용해 그린 그림의 표준인 것처럼 보인다. 즉, 누구라도 그림판과 마우스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면, 급양만와의 그것과 유사한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다.
그는 그릴 필요가 없는 것들은 애써 그리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반드시 그려야 할 것들만 그린다. 오로지 그것의 기능에만 충실하다.‘ _ ’만화 아닌 만와‘ 중
평론을 하는 이들의 시작은 기존 질서에 대한 의문과 물음일 때가 많다. 그리고 일탈과 전복 속에서 잠재된 사회적 시선을 찾아 그 방향을 응원하고, 경고하는 것이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만화, ‘만화의 날’이 만들어지게 만들었던 비주류의 만화가 웹툰으로 산업화, 대중화되면서 폭발적으로 다양해지고 확산되고 있는 시대. 그 확산의 흐름 속에 의외로 고정적이고 일방향적인 모습 또한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고정적이지 않은 작품을 평론으로 세상에 내보인다는 건 평론가가 새로운 질문을 사회 속에 씨를 뿌리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평론에서 좀 더 이렇게 공식적으로 다뤄짐으로 인해서 다른 분들이 ‘나도 저런 만화를 그려보고 보고 싶다’라는 마음을, ‘그려봐야겠다’라는 행동으로 좀 이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요. 지금 실제로 그 만화 그러니까 <급양만와>라는 작품이 많은 독자들을 그렇게 이끌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점점 더 뭔가를 배워야 될 것 같고, 뭔가를 막 장비를 다 마련해야 될 것 같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사실 만화는 정말 종이 한 장과 펜만 있으면 자기가 누구나 그릴 수 있고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걸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매체로 장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는 굉장히 장벽을 없애는 데 많이 기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평론에도 다뤘듯이) 어떤 고등학생이 자기도 그림을 그려서 보내신 거예요.”
아무리 산업화되고, 디지털화되고, 전문화된 만화지만 언제나 가까이 존재했던 매체임을 말하는 듯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전복적 가치를 찾아낸다. 그건 만화란 매체가 그 어느 매체보다 사회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급양만와가 언어유희를 즐겨 활용한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김급양은 한때 십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급식체’를 즐겨 활용한다.
그의 만와는 언어를 가지고 놀면서 특유의 유머를 구사한다. 이처럼 급양만와는 탈-문법적 표현이나 언어유희의 활용을 통해서 언어에 요구되는 규칙이나 질서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의미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언어의 본질적 기능을 충실히 이행한다.’ ‘만화 아닌 만와’
바로 여기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언어의 본질적 기능은 무엇인가? 기괴하고, 장난 같은 그 말과 표현들이 왜 본질에 가까울 수 있는가?
“제가 맞춤법 틀린 글이라고 표현을 했는데요. 사실 맞춤법을 지켜야 된다는 게 어떤 공식적인 글이나 그런 거에서는 감각적으로 있잖아요.
언어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겠지만 가장 주된 기능은 소통하고 전달하는 기능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요즘 누구나 다 인터넷을 하고 온라인에서 활동을 하니까 모바일로 글을 쓰고 그래서 맞춤법을 안 지키는 경우가 되게 굉장히 많잖아요. 사실 이거는 어떻게 보면 좀 문해력 이슈라고 해서 부정적인 측면으로 말해지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식의 그러니까 맞춤법이 틀린 의도적으로 맞춤법을 틀리게 함으로써 약간 그들만의 어떤 또 다른 표현 방식을 이렇게 만들어 나가는 측면도 있다고 저는 봤거든요.
그래서 <급양만와> 작가가 쓰는 표현들이 맞춤법은 지키지 않지만, 기존의 어떤 규칙이나 질서에는 순응하지 않지만 어쨌든 전달하고 표현하는 기능에는 그 뉘앙스나 그런 것들을 더 잘 살리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본질을 위한 질서의 파괴라고 할 수 있을까? 단지 파괴만으로 끝난다면, 그건 또 다른 오해와 편견의 시작이 된다. 하지만 평론가는 여기서 공간의 창출을 보는 듯하다.
‘만와적이란, 그것을 그것으로 만드는 핵심을 충족하는 한편 그것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그것 내부에서 그것을 거부하며 작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영상비평플랫폼 《마테리알》과 시를 다룬 (유사) 비평서 <미친, 사랑의 노래>를 들 수 있다.
이들의 목표가 대상(인물)의 발굴이 아닌 공간의 창출에 방점이 찍혀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이들은 함께 활동하고 대화하는 공간인 일종의 ‘플랫폼’을 형성하려는 것이다.
‘비평의 비평’이라는 기획에서는 정형화되고 관습화된 비평계를 향해 날 선 비판을 드러내며
‘스루패스로서의 비평’과 ‘유사 비평’은 모두 기존의 등단 제도가 요구하는 것처럼 작품을 엄중하고 진지하게 대하기보다는, 그것을 마음껏 ‘갖고 노는’ 과정에 주력한다. 기존의 합의된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방식대로, 따라서 정형화된 방식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대로 말이다.
비평가 또는 만화가라는 명명이 아니라, 글(비평)을 ‘쓰거나’ 만화를 ‘그리는’ 행위로써 그들은 들고 나는 자리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길 것이다.’ _ ‘만화 아닌 만와’ 중
하지만 이런 자유와 공간은 또 다른 권력이 되지는 않을까?
수없이 많은 공동체의 형성이 아니라 또 다른 울타리가 되는, 자신들의 것만을 우월하다고 협소함을 독특함으로, 개성으로 포장하는 경우를 우리는 적지 않게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아니라 행위에 주목한다면, 아무래도 ‘이름짓기를 통한 구분하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다라며 그 시도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니까 제가 글에서 언급한 두 사례가 <미친, 사랑의 노래>라는 책과 《마테리알》이라는 비평 플랫폼인데 그 두 책의 방향성에 되게 공감을 깊이 했었어요.
사실 뭔가를 비판을 하려면 어떤 대상이 분명하게 좀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비평계라는 게 뚜렷하게 있는가라는 거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기존의 기성계 비평계를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어떤 활동 방향에 대해서는 되게 공감이 많이 가더라고요. <급양만화>나 두 사례도 어떤 장벽을 두지 않고 장벽을 허무는 그거에 되게 방점이 찍혀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만의 그림체라든지 아니면 그런 표현 방식이라든지 그런 것도 어떤 뭔가를 굉장히 숙련되거나 뭔가를 알아야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누군가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 기존 권력화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보면 진보란 다른 축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산업적인 발전과 성공이 있다는 것은 그를 막고 있던 것을 극복해낸 진보가 있었던 것이고, 지금의 성공 역시 그 성공을 이루기 위한 수많은 노력과 방해하는 것이 있었고, 그에 대한 내부적인 관찰과 비평이 있었던 것이다. 이름짓기를 거부하고, 그림체 없는 그림을 그리는 만화가 아닌 만와는 그런 의미에서 현재 중요한 화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만화가 산업이라는 명명 하에 거대한 시스템으로 포획된 오늘날의 상황을 고려할 때, 만화에 충실한 동시에 만화가 아님을 선언하는, 즉 만화이지만 만화라는 명명을 거부하고 만와로서 자신을 새로이 규정하는 급양만와의 시도는 그래서 반갑다.’ _ ‘만화 아닌 만와’ 중
평론 속에 담긴 현재 웹툰을 바라보는 시선은 웹툰산업 자체보다 평론가가 사회와 예술을 바라보는 여정이 담겨 있어 보인다.
“사실 K-웹툰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이라기보다는, 어쨌든 우리나라 웹툰이 굉장히 글로벌 시장에서 이렇게 성공하고 많은 독자를 끌어 모으는 건 굉장히 긍정적인 현상이고 그거는 정말 작가님들의 노력이 보상받는 그런 좋은 결과라고 생각해요. 사실 되게 딜레마적인 지적인데 이거를 정부에서 너무 정책적으로 산업화라고 끌고 가려고 하면은 그 순간부터 여기에 포함되지 못하는 지점들이 분명히 생길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지금은 이제 웹툰이 이렇게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예전부터 많은 드러나지 않은 측면의 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이제 정부 주도적으로 끌고 가면 그게 너무 정책적인 그런 어떤, 포괄되지 못하는 지점들이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부분들이 좀 더 중요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사실 만화도 사실 예술이잖아요. 예술 창작의 과정에서는 처음에는 이 머릿속에만 있는 거를 예술 창작 과정이 머릿속에 있는 거를 이렇게 표현하는 거잖아요. 근데 이제 완성된 것을 제3자가 봤을 때의 그 느낌이랑 이게 작가의 머릿속에 있을 때랑은 되게 달라 보인단 말이죠. .아직 완성품으로 나오기 전 단계에서 걸러지면 훌륭한 작품들이 나중에 빛을 못 보게 되지 않을까 예술 창작에 있어서는 그런 점을 특히 중요하게 인식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김윤진 평론가의 글은 상당히 담백한 편이다. 본인 역시 쉬운 글을 쓰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는 논지를 좀 더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전달하려는 노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건 사회의 현실, 현상과의 깊은 관계에서 나온, 어쩌면 사회과학의 논리성이 예술평론에 접붙여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급양만와>에서 시작된 관심은 예술잡지와 플랫폼의 사례를 넘어 무한도전의 ‘홍철 없는 홍철팀’과 요즘 놀이로 소비되고 있는 ‘테무’ 관련 내용으로 이어진다.
산업화와 글로벌화가 가져오는 달콤함 너머의 가장자리에서 예술적인 다양성을 소비하는, 어쩌면 의도적일 수밖에 없는 경계와 장벽에 의해 소외받기 쉬운 작가의 현실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우리 평론이 ‘현학적이다’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건 문법적인 것이라기보다 사회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여기서 확인해본다.
“만화평론상에서 대상을 받아서 좀 어깨가 무겁다는 생각을 좀 하기도 해서 만화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좀 들여다보고, 또 제가 그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은 좀 만화와 접목시켜서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 쓰려고도 좀 생각하고 있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약간 사회 현상과 접목시키는 지점들 그러니까 제가 이번에 만화랑 비평 사례를 가져와서 연결을 시켰잖아요. 이런 식의 작업을 좀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좀 했었어요. 만화가 사회 현상을 되게 날카롭게 포착한 구점들이 있는데 약간 그냥 재미있으니까 재미거리로 소비하고 넘어가는 그런 지점들이 좀 있는 것 같아서 그런 걸 좀 더 짚어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좀 했습니다.”
김윤진 평론가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글을 쓰고 있고, 갤러리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지만, 먼저 쓰고 싶은 거에 대해서 먼저 좀 읽고 난 다음에 그런 식으로 그러니까 좀 찾아나서는 편이라고 한다.
그런 사회에 대한 관심, 그리고 적극적인 시선의 모색과 발견은 어쩌면 김윤진 평론가의 여정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평론이 가는 길이 곧 그의 시선이 향하는 여정이기 때문이고, 사뭇 달라 보이는 경계를 넘나드는 그동안의 여정이 결국 하나의 결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만화평론가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김 평론과 만화와의 인연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었음이, 만화평론은 그렇게 다양성의 포괄로 가야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