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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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양훈도
  • 승인 201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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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피크] 하늘 그물은 넓고 넓어서 성기지만 새는 곳이 없다(天網恢恢 疏而不漏). <노자> 말씀은 역사엔 해당이 없다. 그물코를 점점 작게 하여 시대에 던지는 작업이 전문적인 역사탐구일 터.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史實)은 수많은 사실(事實)이 새 나간 다음 건져 올린 찌꺼기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사실(史實)은 다양한 얼굴로 드러날 수 있다. 중층 복합 구조이기 때문이다.

박제가 되지 않는 역사를 위하여

▲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이라는 부제가 붙은『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은 역사학자 백승종이 정조 시대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심층을 파고 들어간‘작업일지’다. 백승종은 1797년 발생한‘유언비어 사기사건’에 주목한다. 강이천, 김건순, 김려 등이 관련된 이 사건은‘역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사건이었으나 웬일인지 정조는 강이천이 벌인 사기극으로 단정하고 사건을 덮어버린다.

하지만 3년 후 정조가 승하하고 신유박해(1801년)가 시작되면서, 강이천 사건 재조사가 진행되었다. 강이천은 청나라 사람 주문모 신부와 연루된 천주교 관련자임이 밝혀졌고, 문초를 받던 도중 옥사하고 말았다. 김건순은 사형을 당했다. 4년 전 정조가 한낱 유언비어 사기사건으로 덮으려 했던 사건은, 북인 명가 표암 강세황의 손자 강이천과 노론 명가 김상헌의 장손 김건순이 천주교와 정감록 신앙 등으로 깊이 얽힌 사건이었던 것이다.

정조는 왜 이 사건을 덮으려 했는가? 사건 직후 정조는 관련자들을 처형하는 대신 이보다 6년 전(1791년) 진산사건 때 자신이 제기했던 문체반정을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바른 문체를 쓰고 글씨를 똑바로 써서 흐트러진 정학(성리학)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왜 총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했을 임금이‘역모’의 분위기가 감도는 사건에 이처럼 얼핏 이해하기 힘든 해법으로 대응했을까?

문체반정은 서학을 믿느라 부모의 신주를 불태워버린 엄청난 사건(1791년 진산사건) 직후 정조가 내세운 방책이다. 소품문(小品文)과 패관잡기(稗官雜記)를 읽지도 쓰지도 말고, 옛 성현의 고문(古文)으로 돌아가라! 정조는 또한 중국에서 패관소품류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서적 수입을 금하고, 과거 시험 답안지에서 글씨를 삐뚤게 쓰는 일도 엄금했다. 뛰어난 시인 이옥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이유도 글씨가 바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강이천 사건이 발생하자 왕은 이렇게 진단했다. “요즘 인심이 착하지 못하고 선비의 취향이 단정하지 못한 나머지 성인이 아닌 자의 글을 보기 때문에 바르지 못한 일을 하게 되고...점차 군부(君父)까지 대수롭게 않게 여겨...이번 일(강이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정조는 강이천 등이 패관소품에 빠져 있었다고 질책하며, 다시 한 번 강력하게 문체반정을 밀어붙인다.

문체반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

문체반정에 대한 현대 역사가들의 통설은 정조가 남인 신진기예들(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을 보호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라는 것이다. 노론 측에서 천주교 신앙을 빌미로 남인의 기세를 꺾으려는 드는 것을 정조가 간파하고, 오히려 노론과 소론의 신진학자들의 문체를 견책함으로써 남인을 감싸려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보면 문체반정은 탕평책의 일환이 된다.

그러나 백승종의 생각은 다르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통설과는 달리 강력한, 더 깊은 층위의 함의를 지닌다는 것이다. 정조는 18세기 후반 조선에 밀어닥친 문화변동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게 백승종의 가설이다.

정조는 당시 지식층 일각에서 깨어나기 시작한“사회적 상상력”에 강력한 제동을 걸고자 했다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회적 상상력은“대안 사회”또는“미래 사회”의 모색을 말한다. 소품에서 날개를 얻은 젊은 조선 지식인들의 문학적 상상력이“사회적”으로 전환될까봐 정조는 전전긍긍했다. 정조가 꿈꾸는 사회는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가 아니라,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이상으로 설정된 사회였다.

백승종은 치밀한 사료 탐구를 통해, 강이천 사건 자체에 노론 명가 후손 김건순이 개입되어 있었고, 바로 이 때문에 정조가 일단 사건을 덮으려 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노론과 맞서기엔 여전히 힘이 부족했던 임금으로서 정치적 타협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이천 같은‘불량선비’들과는 끝까지 ‘문화적으로’ 맞서야 한다는 점을 직감했다.“그것이 문체반정이다. 정조의 겨냥은 정확했고 성공했다.”

18세기 조선사회와 정조

이 견해는 개혁 군주 정조의 상을 도전적으로 뒤집는다. 이 가설이 입증된다면 정조는 개혁군주가 아니라 성리학이라는 보수 이데올로기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구를 봉쇄해버린 임금이 된다.“정조의 르네상스는 바로 이런 바탕 위에 건설된 것이었다. 그것이 과연 르네상스일까? 르네상스란 재생이요, 부활이요, 인문정신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르네상스는‘속박’이었다. 따라는 나는 정조를 가리켜 ‘르네상스의 군주’라고 하는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못하겠다.”

백승종이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강이천 사건이라는 사실(史實)을 파고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는 프롤로그에서부터 정조와 강이천의 관계를 18세기 조선 문화의 두 흐름이 맞부딪친‘문화투쟁’으로 본다는 대담한 작업가설을 제시했다. 정조에 대한 평가는 이 가설의 논리적 귀결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는 조심스럽다. “물론 이러한 나의 가정은 아직 무르익지 못한 것이다. 추론에 빈틈도 있고, 잘못된 사실에 기댄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부족한 부분을 곱씹으며,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하나씩 점검하고자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조의 모습이 이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바와 정반대일 수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울 독자가 적지 않을 듯하다. 수원 시민인 나 역시 적잖이 곤혹스럽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곰곰이 헤아려보면, 정조를 이처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큰 다행이다. 정조를 신비화하는 맹목에 빠지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다. 정조와 정조의 시대를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저 시대로부터 더 풍부한 역사적 통찰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점은 더 말해 입 아프다. 정조가 진정 개혁군주라면 이러한 탐구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장려하지 않았을까?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의 미덕은 잠정적 결론보다 ‘역사 그물질’의 과정을 촘촘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역사가 백승종의‘작업일지’다. 후에 손질과 편집이 이뤄졌으나, 하루하루 다양한 사료를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 가면서 배운 바, 느낀 바, 깨달은 바를 솔직하게 기록했다. 명백하게 밝혀진 사실 앞에서 애초에 세웠던 일부 추론을 포기하거나 수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초의 문제의식은 집요하게 밀고나간다. 독자는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역사가의 그물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실감할 수 있다.

역사의 중층 복합구조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어떤 역사가를 신뢰할 수 있는지는 그가 사료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근대 역사학이 정립된 이래 모든 역사학도는 사료를 비판적으로 대하라고 배우며, 그에 관한 훈련을 쌓는다. 하지만 실제 역사가들의 작업 중에 엄밀한 사료 비판이 과연 선행되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적지 않다. 사료에는 기록자와 관련자의 세계관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중층적으로 얽혀 있다. 역사가는 그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할 뿐만 아니라‘역사의 시간’이 납작하게 만들어버린 기록자와 관련자의 내면까지 입체적으로 상상해내는 힘을 길러야 한다.『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는 그 작업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역사가는 언제나 기록에 의존하지만 역사가의 작업은 그 기록을 만든 사람들과‘기 싸움’을 벌이는 데서 시작한다. <실록>을 편찬하고 <추안>을 기록한 선비들은 당대 최고의 학자요, 정치가들이었다. 말하자면, 조선 사회에서는 최고의 이론가요, 정치와 행정의 실무자인 당대 최고의 양반들이 역사를 편찬한 것이다. 그들의 필치는 교묘하다. 평생 글을 읽고, 쓰고, 고치는 일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나 같은 평범한 역사가는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시대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시대를 읽는 일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을까?『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이 던지는 또 다른 화두다.

*수원시평생학습관에서 발행하는 동향리포트 <와> 2014년 11월12일자에 이미 수록했던 글입니다. 약간 다듬고 소제목만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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