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억압은 정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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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억압은 정의가 아니다
  • 범상스님(6.15경기본부 홍보위원) 기자
  • 승인 2014.0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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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범상스님(6.15경기본부 홍보위원)
범상스님(6.15경기본부 홍보위원). ⓒ 뉴스피크

실험에 따르면 어린아이들이 쉽게 범죄에 노출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라고 한다.

TV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화나 심지어 학교에서까지 좋은 사람은 잘생기고 예쁜 외모를 가진 반면 나쁜 사람은 험상궂거나 못생기게 표현 한다. 그리고 낯선 사람일지라도 무거운 짐을 들었거나 길을 묻는 등 어려움에 쳐했을 때는 도와주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아이들은 외모를 기준으로 선인(善人)과 악인(惡人)판단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므로 잘생긴 외모를 가진 사람이 도움을 청하면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나선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같은 심리는 법을 집행하는 판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과연 드라마나 영화 같은 픽션을 제외하고 실재로 범죄형 얼굴이 따로 있을까?

적어도 수년간 교도소법회에 나가고 있는 필자의 경험에는 범죄형 얼굴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기도를 오래하면 얼굴이 맑아진다거나, ‘신수가 훤하다’는 말처럼 마음상태에 따라 조금은 달라 질수 있어도 근본적으로 외모와 범죄는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대부분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 위와 같은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거의 습관적으로 너는 장차 대통령이 되어라, 국회의원이 되어라, 교수가 되어라, 장군이 되어라, 판검사가 되어라 등등으로 가르쳤고, 우리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해왔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교육덕분에 한국인들의 무의식은 출세를 꿈꾼다. 그래서 청문회 등에서 밝혀지는 파렴치한 행동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지만 그 시간만 모면하면 민중은 언제나 관대하여 잊어버리고, 그들은 언제나 당당하며 국민의 심판이라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한다.
 
여기에 민주화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는 차별과 억압의 전통문화는 유사 신분관계를 만들었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도령과 성춘향을 패러디한 보험사 광고에 “너희가 백성들을 행복하게 한 자 들이냐”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광고는 신분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현재 우리사회는 아무런 비판 없이 통용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서 아직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눈치 채지 못한 독자들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가족동반 모임에서 사장아들과 직원아들은 “사장님 아드님”과 “내 자식 놈”으로 엄격히 구분된다. 다시 말하면 사장과 직원은 직업상의 관계 일뿐 신분의 차이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인과 하인 사이에나 있을 법한 언어체계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은 공권력을 사사로운 사랑에 남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세를 꿈꾸는 한국인들은 “암행어사출도여~”라는 대목에서 속이 후련함을 느낀다. 이처럼 출세만 하게 되면 그 권력으로 애인을 구하든, 법을 어기든, 불법으로 재산을 증식하든, 아랫것들은 알바가 아니며, 그것을 동경하는 민중들은 윗사람이 하시는 일이므로 따지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은 물론 자녀까지도 정당한 이유 없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종북 좌빨척결”을 입에 달고 산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제식민지와 미국의 간접지배는 산업(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칭송하는 반면, 내 민족 내 형제를 향해서는 우리 손으로 때려잡자고 가르친다.

이처럼 무엇을 해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은 옳고 정의로운 것으로 통용되는 사회는 통일은커녕 사랑하는 자식의 미래조차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손들의 미래를 위해서 차별과 억압이 옳고, 예의바름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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