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문병을 다녀왔다. 오복서점을 운영하는 헌책방 주인장이 병원에 입원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분을 안 지 벌써 20년이 넘었으니 단골이라고 할 수 있다. 1년 365일 중 음력 설날과 추석 연휴 며칠만 쉴 뿐, 1년 내내 서점에서 도(道)를 닦았는데도 세월은 비껴갈 수 없었나보다. 모두 건강하시길 빌어본다.
한참 전으로 기억되는데, 어느 책에서 음식과 연관된 내용을 보다가 문득 『고사촬요(攷事撮要)』라는 책자를 만나게 되었다. 책명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 책에 음식이 소개되어 있다는 얘기는 사실 처음 접한 것이었다. 최신 정보기를 활용하여 검색해 보니 다양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었다. 욕심이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여 그 『고사촬요』를 수소문해 보았으나, 글쎄! 라고 하는 답만이 올 뿐 만나보지 못했다는 전갈이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원본을 마주치고 싶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 책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으며, 그 속에 담겨진 내용이 무엇일까 답답한 마음에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그런데 평소처럼 주말을 이용하여 오복서점을 찾아가게 되었다. 좀 추운 날이라 그런지 따뜻한 커피가 무척 반가웠으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둥굴레 차까지 한 잔 더하여 추위를 녹였다. 아담한 책방에는 가지런하게 꾸민 책들이 다소곳이 앉아서 세월의 무게를 이기고, 보다 필요한 서생을 위해 무한정 기다려주는 인내도 가르쳐주는 그야말로 정감이 묻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깨알같이 서 있거나 누워 있는 각기 다른 크기의 책자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냥 삼매경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헌책방의 한 풍경이다. 새 책방에는 시간이 흐르면 어제까지 진열되어 있던 친구들이 새로운 친구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어 그 흔적이 사라지는데 반해, 헌책방에는 그 친구들이 오래도록 다른 친구와 짝하여 노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날도 우연히 서가에 나란히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을 열심히 구경하는데, 그 책자의 이름표가 그리 선명하지 않았던 탓일까, 다시 한 번 내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분명 그쪽 서가는 보다 세심히 살펴보면서 혹시나 임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행운을 기원하던 곳이다. 어쨌든 비로소 그렇게 찾아다닌 『고사촬요』 관련 책을 그곳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헌책방이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는 로또가 아닐까, 감히 돌직구를 날려 본다.
조심스레 앞부분부터 천천히 책장을 넘기면서 베일에 싸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이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뒷부분으로 넘기다보니 순간 아찔한 쾌감에 갑자기 온 몸이 더워지는 기분을 만끽하였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고사촬요』의 영인본이 실려 있는 게 아닌가? 감동이 밀려왔다. 기쁜 마음에 주인장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왔다. 한걸음에 달려와서 다시 연애편지를 펼치듯 책과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비록 영인본이지만, 내가 필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내용인지라 그저 즐거운 마음뿐이었다.
이 책에는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대명기년(大明紀年)부터 팔도정도(八道程道)까지, 또한, 잡방(雜方)이나 서책(書冊)의 가격, 책판목록 등 재미있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 목차만 보더라도 관료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필요한 여러 지식을 실감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한두 군데만 잠시 살펴보자.
창자와 쓸개가 없는 생선은 먹어서는 안 된다. 만약 먹으면 3년 동안 남자는 양기 부족으로 방사를 못하게 되고, 여자는 생식이 끊어진다.
저절로 죽은 육축(六畜)은 모두 역병으로 죽었으니 먹으면 안 된다.
물에 뜨는 돼지고기는 먹으면 안 된다.
고기에 구슬 같은 반점이 있으면 먹지 말아야한다.
가금류의 간에서 푸른색이 나면 사람을 해친다.
닭이나 들새가 발을 오그리고 죽은 것을 먹으면 사람이 죽는다.
백주(白酒)와 개고기를 함께 먹으면 촌백충이 생긴다.
음식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우선이다. 음식과 건강의 상관관계를 다소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회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의 지혜가 녹아 있는 것이다. 또 이런 구절도 찾아진다.
굶주린 사람 구하는 법 : 굶주려 죽게 된 사람에게 갑자기 밥을 먹이거나, 뜨거운 음식물을 먹게 하면 반드시 죽는다. 그럴 때는 먼저 장즙(간장)을 물에 타서 마시게 한 다음 식은 죽을 주고, 그가 소생하기를 기다려서 차차로 죽과 밥을 주어야 한다.
요즈음 세상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현실이겠지만, 당시 사회에서 백과사전으로 사용되었을 이 책자를 보면서 유구한 인간의 역사를 보는 듯해서 감회가 새롭다. 이 책의 저자는 어숙권(魚叔權)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한 생존연대는 미상이다. 비록 야족당 어숙권은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서얼의 신분을 타고나서 평생 중국어 전문 관료로 살았다고 한다.
그가 편찬해 교서관을 통해 활자본으로 만든 『고사촬요』는, 조선 명종 9년(1554)에 간행했다고 하는데 현재 이 판본은 만나볼 수 없다. 그 뒤 이 책자는 계속해서 증보가 되는데, 선조 8년(1585)에 허봉이 증보한 목판본부터는 보인다고 한다. 어숙권의 그 책이 찾아지면 우리의 서지학에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백과사전의 효시가 나타나는 것이다. 어찌 중요하지 않은가? 찾아나서야 한다. 어딘가에 존재할 듯싶은 그 책자를 우리가 찾아나서야 한다. 멀리 직지도 찾으려고 하는데, 이 정도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전화가 걸려왔다. 서점 주인장의 밝은 목소리였다. 퇴원을 했단다. 그리고 주말까지만 쉬고 다시 전선으로 나온단다. 좀 더 쉬기를 권했지만 한사코 다 나았단다. 이보다 좋은 소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건강을 되찾고 그토록 열심히 근무하던 직장에 출근한다는데 환영을 해야겠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쉼터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분에 모두들 한걸음에 달려갈 거라 생각한다. 주변에 사는 우리의 이웃은 그래서 좋은 건가 보다.
책장에서 주인장이 없는 관계로 얼마동안 나오지도 못하고, 먼지만 마시며 기다렸을 우리들의 친구를 만나러 가야겠다. 그들에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도록 다시 온기를 넣어 주어야겠다. 그들도 우리를 반길 것이다. 우리도 그들이 그리웠다고 말한다면 소통이 가능할까? 소통되는 세상에서 사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
* 필자 소개
김희만 : 한국사를 전공하였으며, 특히 정치사회사에 관심이 많다.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헌책을 좋아하여 시간이 날 때마다 책방을 뒤지고 다니는 헌책장서가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