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이 ‘당나라 군대’에 주목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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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이 ‘당나라 군대’에 주목한 까닭은?
  •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장)
  • 승인 2014.03.27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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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 ‘무인 정조’ (2)

1777년 2월 1일, 밤 9시, 경희궁 흥정당에서 야대(夜對)가 열렸다. 도승지 홍국영도 경연을 주관하는 참찬관으로 참석했다. 몇 차례 열린 주강과 달리 야대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교재는『육선공주의』로 당나라 때의 관료이자 학자였던 육지가 왕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간(諫)한 글을 모은 책이다.

“야대할 때는 나누어 읽는 것이 좋겠다”는 정조의 제안에 따라 신하들이 제1권을 돌아가며 읽었다. 책읽기를 마치자 시독관 이재학이 읽은 내용을 풀이하고, 임금이 신하들로부터 솔직한 충언을 들으려면 마음을 열고 성실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 정조대왕 어진. ⓒ 뉴스피크
공감을 표시한 정조가 질문을 던졌다.
“당나라 때에 군대를 거느리는 신하 가운데 적격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싸우기만 하면 패하였고 아홉 절도사들도 한꺼번에 패하기에 이르렀던 이유가 무엇인가?”

시독관 이재학이 대답했다.
“그때에 장수들을 모두 가려서 보냈는데도 매양 패배했던 것은 당시의 임금이 질투하고 의심한 까닭에 그런 것입니다.”

검토관 이유경도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소인이 중간에서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계략과 일 처리가 처음부터 군사실무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대를 출동시킬 때마다 공이 없는 탄식이 있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소인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렸다고 하더라도 3년 동안의 전쟁에서 어떻게 한 사람도 공을 이룬 사람이 없을 수 있겠는가?”

“……”

“이는 반드시 그렇게 된 이유가 있다. 이런 일들에 대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대체로 여러 해 동안 전쟁을 계속하면서 싸움하는 족족 패하였는데, 원인을 따져볼 때 거기에는 세 가지 폐단이 있다.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는 방도는 반드시 먼저 신중히 골라야 하고, 임용한 다음에는 의심하지 않아야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장수를 내보낸 뒤에 내시를 시켜 군대를 감시하고 동정을 살피게 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폐단이다. 성 밖의 군사일은 장군이 주관한 뒤에 호령을 내려야 저절로 지휘체계가 서게 되는 법인데, 반드시 공문으로 조정을 거치도록 한 결과 급한 정황에 대처하는 조처에서 언제나 시기를 놓쳐 사세를 잃게 된 것이 두 번째 폐단이다.

곽자의·이광필은 모두 명장들이지만 권한을 맡기지 않았고, 또 아홉 절도사를 한꺼번에 출병하도록 하여 서로 의심하게 만들어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오게 된 것이 세 번째 폐단이다.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장수에게 성과가 있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여러 차례 싸워도 공을 세울 수 없었던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이재학이 말했다.
“참으로 전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다시 정조가 물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무슨 말인가?”

이유경이 대답했다.
“옛 글을 익혀 새 글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정조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이해하는데 대체로 옛 글을 익히면 그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어 자기가 몰랐던 것을 더욱 잘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 양귀비, 일본 에도 시대 호소다 에이시가 그렸다. (사진 : 위키피디아)
정조의 말을 이해하려면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755년,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낙양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이 넘쳐났다. 신라에서 로마까지 연결된 비단길로 동서 문명이 교류하였고, 풍요 속에서 문학과 예술도 활짝 꽃을 피웠다. 당나라는 열린 사회였다. 군대에서도 이민족 출신의 유능한 장수를 차별 없이 받아들였다.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와 돌궐 출신인 안녹산과 이광필을 비롯한 이민족 출신의 장수들이 대장군으로 활약하였다.

현종은 ‘개원성세’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열었던 군주였다. 그러나 재위 후반부터 성공에 도취되어 인재등용을 소홀히 하고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들의 아내였던 양옥환을 귀비로 삼아 환락에 빠져들고, 양귀비의 종형제 양국충을 재상으로 삼으면서 조정은 부패와 사치로 병들어갔다.

755년 11월,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현종은 도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현종은 살아남기 위해 애첩 양귀비까지 죽여야 했다. 장안과 낙양이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무렵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던 두보가 헤어진 가족과 이백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지은 시가 여러 편 남아 있어 그때의 비참한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 피난을 가는 현종. (사진 : 위키피디아)
현종이 물러나고, 아들 숙종이 즉위했다. 열 달 동안  쥐를 잡아먹고 죽은 사람을 먹으면서1만의 병력으로 20만 반란군의 남하를 막아냈다. 덕분에 곽자의(郭子儀, 697~781)는 반격할 준비를 마쳤다. 757년 9월, 곽자의는 단숨에 장안을 탈환하고, 10월에는 낙양까지 수복하여 숙종이 장안으로 환궁할 수 있었다.

숙종은 곽자의와 아홉 절도사들에게 반란군의 토벌을 명하고, 환관 어조은을 관군용사로 임명하여 절도사들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아홉 절도사들이 반란군을 포위했으나 어조은의 미숙한 판단과 전투를 총지휘할 대장이 없었던 까닭에 제대로 공격조차 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당나라 군대는 연패의 수렁에 빠져 들었다. 결국 아홉 절도사는 하북의 전장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정조는 당나라 군대가 연패한 이유로 군주의 의심을 첫째로 꼽았다. 숙종은 사람을 쓸 때는 “반드시 먼저 신중히 가려야 하고[必先愼簡], 임용한 뒤에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任之勿疑]”는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 둘째는 장수에게 작전권을 맡기지 않은 점을 꼽았다. 셋째로 지적한 지휘체계의 혼란은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문제이기도 했다. 이듬 해 7월, 정조는 ‘경장대고’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밝히고 군제를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16년이 지난 1793년, 정조는 영의정 홍낙성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라에 가장 소중한 것은 정승과 장수이다. 내가 먼저 장수의 일로 말하겠다. 곽자의는 복장이고 이광필은 지장이었다. 이광필의 용병은 귀신같아서 때때로 곽자의도 따를 수 없었으며 호령이 한 번 내려지면 진중에 광채가 더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그러나 벼슬이 한껏 높고 공이 천하를 덮으면서도 일신에 탈이 없고 집안이 온전한 사람으로는 1,362년 동안 오직 곽자의 한 사람 뿐이었다. 그래서 지모가 복의 힘을 덮을 수 없음을 비로소 알았다.”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비방이나 모함에 빠진 일이 없었다는 홍낙성에게 정조는 “그대는 나에게 곽자의와 같다”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곽자의를 언급할 때마다 정조는 홍국영을 떠 올렸을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역린(逆鱗)’을 건드린 홍국영의 실수는 그 자신만의 불행이 아니다.

* 필자소개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장) : 1990년부터 『무예도보통지』의 무예24기를 익히고 가르치는 일을 해 왔으며 『조선의 협객 백동수』(푸른역사)를 펴냈다. 후반생에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궁리하다가 일흔 살이 되었을 때 3대가 함께 수련할 수 있는 생활무예를 정립하는 걸 목표로 세웠다. 민족무예를 정립한 조선 무사들의 삶을 복원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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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진 2014-04-03 13:46:32
잘 읽었습니다. 혹국영의 실수를 좀 더 자세히 다려주세요.

김창호 2014-04-02 19:53:10
“반드시 먼저 신중히 가려야 하고[必先愼簡], 임용한 뒤에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任之勿疑]”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남문서점 2014-03-29 16:35:21
좋은글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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