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 그의 이름은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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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그의 이름은 이성
  •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장)
  • 승인 2014.03.13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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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 ‘무인 정조’ (1)

▲ 《민족무예》창간호 표지. ⓒ 김영호
1994년 여름에 《민족무예》창간호를 펴냈다. 회보를 펴내면서 내걸었던 주장이 있다. 벌써 꼭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때 다짐했던 스스로와의 약속을 오늘까지 변함없이 붙들고 있기에, 기념으로 전문을 옮겨 보았다.

“우리 무예의 고전인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함에 있어 빠트릴 수 없는 과제가 바로 우리 무예를 세우는데 헌신한 인물들을 만나는 일이다. 이 분들의 삶을 더듬어 가다보면 바로 여기에서 한민족의 힘찬 역사를 만날 수 있고, 우리 몸짓의 원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들의 게으름과 무관심으로 내팽개쳐진 투쟁의 역사, 곧 무예사를 되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와 믿음에서 이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아직 이런 일이 제대로 진행된 적이 없고, 또 우리의 역량으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일단 시작하려고 한다.”

창간호 첫머리에 <역사 인물 찾기1 정조대왕>이란 글을 실었다. 이것은 필자가 정조에 관해 최초로 쓴 글인데 첫머리가 이렇다.

“그의 이름은 이성”

▲ 《민족무예》창간호에 실린 글 <역사 인물 찾기1 정조대왕>. ⓒ 김영호
필자가 이 글을 쓸 때 중요하게 참고한 책은 『정조실록』과 『국조보감』이었다. 그런데 기가 막히는 사실을 발견했다. 1993년에 펴낸『정조실록』에는 “왕의 성은 이씨, 휘는 산(祘)이요, 자는 형운이며…”라고 되어 있는데 1996년에 펴낸『국조보감』에는 “휘는 성(祘)이요, 자는 형운이다”라고 번역되어 있었던 것이다.

▲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96년 펴낸『국조보감』에 나온 정조 이름. ⓒ 김영호
▲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93년 펴낸『정조실록』에 나온 정조 이름. ⓒ 김영호
두 책 모두 ‘민족문화추진회’라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국가번역기관에서 펴낸 것이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혼란스러워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한국사대사전』을 펼쳤더니 ‘성’으로 되어있었다. 결국 뒤에 펴낸 책이 앞에 나온 책의 오류를 수정한 것이라 믿고 정조의 이름을 ‘이성’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필자가 다시 혼란에 빠진 것은 2007년 MBC에서 ‘이산 정조’라는 드라마를 방영하면서 부터였다. 이때 고문헌 연구가인 박철상씨가 정조의 이름은 ‘이산’이 아니라 ‘이성’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씨는 정조의 명으로 1796년에 펴낸 『규장전운』에 ‘祘’을 ‘성’으로 발음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가 펴낸『규장전운』에 나온 祘자. ⓒ 뉴스피크
그런데 1998년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펴낸『국역홍재전서』에는 다시 ‘산’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혼란은 민족문화추진회가 자초한 일이다.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민족문화추진회를 잇고 있는 한국고전번역원이 나서야 한다. 왜 이런 문제가 빗어졌는지 솔직하게 해명하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혼란을 바로잡아 주어야 옳다.

▲ 정조대왕 어진. ⓒ 뉴스피크
왜 무인 정조인가?

단언컨대 우리 역사에서 정조만큼 풍부한 기록을 후대에 남겨준 임금은 없다. 그는 『정조실록』의 서너 배가 되는 방대한 『일성록』을 편찬했고,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라는 경이로운 보고서를 남겼다. 채제공, 심환지를 비롯한 신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낸 수백 통의 편지도 남아 있다.

어디 그뿐이랴. 이명기, 김홍도, 신윤복을 비롯한 궁중 화원들을 통해 그 시대 인물들의 초상과 풍속화를 그리도록 하여 그 시대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이처럼 재위 24년 동안에 그의 손으로 지은 글, 그의 지시로 만들어진 책들의 종류와 권수가 너무나 많아 제목만 늘어놓아도 이 지면을 다 차지할 것이다.

그렇다! 지나친 독서로 인해 조선 국왕 최초로 안경을 썼던 책벌레, 184권 100책의 개인문집『홍재전서』를 남긴 정조의 이름 앞에  ‘무인’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런데 흥미롭게도 정조를 공부하면 할수록 그가 ‘무인’이란 단어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두터워진다. 

널리 알려졌듯이 정조는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지닌 명궁이다. 그는 궁궐 밖을 벗어나면 갑주나 융복 같은 군복을 입고 무장한 상태로 말을 탔으며, 매년 빠트리지 않았던 능행길에서는 친히 군대를 지휘하였다. 장용영을 창설하여 오랜 평화로 느슨해진 군대를 개혁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수원에 자급자족의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병학통』과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여 조선 병법을 완성하고 군사 교육의 표준을 세웠다. 흩어져 있었던 이순신 장군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여『이충무공전서』를 펴내도록 했던 이도 정조였다.

이러한 정조의 상무철학은 1778년 7월에 선포한 ‘경장대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무(武)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표현했다.

“군자는 싸움을 하지 않을지언정 싸움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
[君子有不戰, 戰必勝군자유부전, 전필승]

* 필자소개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장) : 1990년부터 『무예도보통지』의 무예24기를 익히고 가르치는 일을 해 왔으며 『조선의 협객 백동수』(푸른역사)를 펴냈다. 후반생에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궁리하다가 일흔 살이 되었을 때 3대가 함께 수련할 수 있는 생활무예를 정립하는 걸 목표로 세웠다. 민족무예를 정립한 조선 무사들의 삶을 복원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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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진 2014-03-14 19:42:04
글 잘 읽었습니다. 무인 정조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과 해설이 기다려 집니다!!

김영호 2014-03-14 17:56:12
장문의 댓글을 달아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정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느껴집니다.

정조딸랑이 2014-03-13 21:06:37
의미있는글 잘봤습니다. 밑 자료 올린 순서대로 읽어세요.!!

정조딸랑이 2014-03-13 21:03:03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정조는 자식이 귀했다. 왕비 청풍 김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고, 의빈 성씨 소생인 문효세자는 요절했다. 늦게 수빈 박씨에게서 순조를 낳았지만, 『규장전운』 완성 당시 일곱 살에 지나지 않았다. 아들 순조를 지나 손자 헌종 대에서 정조의 대는 끊겼다. 이름까지 바꿔 후손이 많기를 바란 정조의 꿈은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정조딸랑이 2014-03-13 21:01:15
임금 이름을 채워 넣었다. 왜냐하면 ‘성’(渻)자는 서약봉(徐藥峯·1558~1631)의 이름으로 자손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약봉, 즉 서성은 조선후기 명문가 대구 서씨의 중흥조다. 후손이 번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 교수에 따르면, 『규장전운』이 인쇄되기 직전 정조는 ‘성(渻)’자를 빼고 그 자리에 자신의 이름인 ‘祘’를 집어넣었고, 이후 임금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성(渻)’자는 다른 문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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