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래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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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래를 아십니까?
  • 노세극(6.15경기본부 홍보위원)
  • 승인 2012.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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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노세극(6.15경기본부 홍보위원)

▲ 노세극(6.15경기본부 홍보위원) ⓒ 뉴스피크
박기래를 아십니까?
지난 주에 6.15를 맞아 다음날인 6월 16일 토요일에 마석 모란 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있는 박기래 선생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추도식을 하였습니다. 진즉에 했어야 했는데 선거다 뭐다 해서 미루다가 6.15 즈음에 하자고 하여 이날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근 5개월만이었습니다. 유족들과 안산지역에서 통일운동을 같이 하며 따랐던 후학들 등 열댓명이 모인 조촐한 자리였지만 고인의 삶을 반추하고 그 정신을 되새겼습니다.

선생님의 묘비명은 “통일혁명가 박기래 선생의 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한평생 통일혁명의 정신으로 살아오셨기 때문에 통일혁명가라는 이름을 헌정하였습니다. 선생님은 1974년 민주수호동지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겉으로는 그렇게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통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님은 헌정 사상 최장기 사형수로 9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서울 구치소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저도 서울 구치소에 수감된 적이 있어서 여러 사형수들을 보아서 사정을 알고 있습니다만 사형수는 사형이 집행되어야만 기결이 되기 때문에 기결수들이 있는 교도소로 보내지 않고 미결수들과 같이 구치소에 있게 합니다.

사형 집행은 미리 통보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언제 집행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라 그날 저녁이 되어야 하루를 더 살았다는 안도감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것입니까? 그리고 자살충동을 방지하기 위해 항시 수정을 차고 있어야 하는데 단지 한 손으로 밥을 먹기 힘들기 때문에 식사 시간에만 교도관이 와서 수정을 풀어 주었다가 다시 채워주는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니 갇혀있는 것도 힘든데 손도 제대로 못놀리는 부자연스런 상태로 지내게 되니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긴 시간을 초인적 의지로 이기셨던 박기래 선생님. 정말 혁명정신이 없었던들 어찌 이를 극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박기래 선생님에 대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혁명가가 아니라 참으로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니 너무도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혁명의 길에 뛰어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일제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의 어린 나이에 홀로 도일하여 오사카에서 낮에는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는 주경야독을 하며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선생이 평생 신조로 삼은 자활사상은 이때부터 형성되었는데 어떠한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항시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도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불요불굴의 정신적 원천이 되었습니다.

교도소에서 석방되어 먹고 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을 때 리어카를 개조한 아이들 놀이마차를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더 어려운 노인들에게 마차를 직접 제작 지원해주어 노인자활복지회라는 단체를 꾸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80여평생을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자활정신으로 사셨습니다.

60년대에 이미 자가용을 굴리고 2층 양옥집에 살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만 민족 분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꼈기에 통일운동의 길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몰려 집안은 풍비박산되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으로 인한 가족들의 고통에 가장으로서 가슴 아픈 회한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한 사람은 3대가 망하고 해방 후 분단에 맞서 통일운동한 사람은 2대가 망하고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한 사람은 당대가 망한다고 이야기하며 고통스런 현실을 묵묵히 감내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사건으로 구속된 동지들 중 사형을 당하거나 교도소에서 의문의 타살을 당한 세 사람에 대해서 늘 잊지 않고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지 못한 것을 항시 안타깝게 생각하였습니다.

2001년 평양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 대축전 행사에 참여하고 와서는 이제 통일이 멀지 않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던 박기래 선생님.

위대한 저작을 남기거나 세인들이 많이 주목하는 분은 아니지만 온몸으로 참다운 인간의 길을 살다가셨습니다. 올해로 분단 66년을 맞이하면서 통일을 위해서 한 생을 바친 분들이 한두분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박기래 이름 석자와 그의 삶과 정신을 기억하였으면 합니다.  

 *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경기본부(대표 윤기석 목사)에서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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