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도서관의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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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도서관의 '오래된 미래'
  • 윤민 기자
  • 승인 2020.0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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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도서관 이야기 01

[뉴스피크] 6월이 지나고 있다. 일 년의 반이 지나고 있고, 교문은 열렸지만 여전히 도서관은 문을 굳게 닫고 있다. 도서관이 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굶어죽거나 일에 심각한 장애를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빈곤함과 곤란함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다만 그동안 그걸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무감해진다는 건 아마 이럴 때 필요한 말일수도 있겠다. 너무 가깝고, 당연하다보니 주6일 언제나 방문할 수는 동네 도서관은 24시간 편의점처럼 편하고 익숙한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익숙한 공간이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일상의 변화와 함께 인간의 가장 오래된 지적 사회 활동 중 하나가 작동을 멈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놀랍고도 무서운 상황인데도 우리는 너무 담담하게 도서관의 장기간 휴관을 받아들이고 있다. 온라인이지만 수업은 진행되고, 학생들은 과제를 수행하고 있으며, 직장인들은 정보를 찾고,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질문은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도서관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2002년 새롭게 개관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외벽에 전 세계의 문자가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한글이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 뉴스피크
2002년 새롭게 개관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외벽에 전 세계의 문자가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한글이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 뉴스피크

도서관은 인간의 지적 활동이 만든 상징일수도 있다. 탐구에서 시작되어, 문자와 종이의 도움으로 저술되고 출판되며, 축적과 독서를 통해 공유됨으로써 인간은 문명이라는 것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의 사소한 변화일수도 있는 도서관의 휴관은 인류 지적활동의 순환계의 한축을 담당해왔던 존재가 이제 그 소임을 달리하기 시작했다는 지표일수도 있다. 사실 요즘 도서관의 경우 공공의 지원을 받는 도서대여점이자 고시원으로 더 많이 활용되기도 한다. 또한 무섭도록 빠르고 다양한 현대 환경은 지식사회에 정보의 수집, 보관, 확산에 대한 새로운 대응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열린 도서관, 전자(디지털) 도서관 및 다양한 인문아카데미와 문화 활동 등은 그런 변화에 대한 도서관의 대답인 셈이다. 

잠시 자료실만 열었던 도서관이 다시 기약없는 휴관에 들어갔다. ⓒ 뉴스피크
잠시 자료실만 열었던 도서관이 다시 기약없는 휴관에 들어갔다. ⓒ 뉴스피크

그래서 도서관이 멈춰있는 이때, 도서관이 우리에게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탐구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그게 달라진 환경에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전자책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포함해서) 지식의 보존과 제공이라는 고전적인 기능을 수행하던 도서관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자 대답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의 시작,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래서 고대 도서관의 흔적은 문명과 도시 그리고 국가의 초기 발상지였던 바빌로니아나 이집트 그리고 그리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도서관의 역사>의 저자는 지식의 역사는 곧 지식을 모으고자 하는 권력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한다. 고대 근동 제국의 도서관이 `황제의 도서관'이었다면 그리스의 도서관은 특혜 받은 자유로운 `시민들의 도서관'이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상상도 ⓒ O. Von Corven / wikipedia | Public Domain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상상도 ⓒ O. Von Corven / wikipedia | Public Domain

그리고 흔적과 전설만 남은 그 고대의 도서관 중 아직도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 

그 시작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전쟁이다.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Alexander the Great 기원전 356년 7월 말~기원전 323년 6월 10일는 신탁을 받기 위해 오아시스로 가던 중 한 어촌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15킬로미터라는 도시의 크기만을 정해놓고 살아 돌아오지 못할 위대한 여정을 다시 떠났다. 그 어촌은 15개의 넓은 도로와 7개의 교차로가 있는 최초의 계획도시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그의 제국은 4개의 국가가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1세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될 고대의 등불인 파로스의 등대 알렉산드리아 등대 Lighthouse of Alexandria, Pharos of Alexandria, 기원전 280년경 완공,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음)을 만들면서 알렉산드리아를 고대의 가장 화려한 도시로 만들었다. 

고대의 신비를 딛고 선 지금의 알렉산드리아는 모로코 탕헤르와 같이 유럽인들의 별장촌이 있으며, 해변도로의 옆으로 정갈하고 편안해 보이는 유럽식 카페가 즐비한 지중해의 여유롭고 현대적인 휴양도시가 되어 있다. ⓒ 뉴스피크
고대의 신비를 딛고 선 지금의 알렉산드리아는 모로코 탕헤르와 같이 유럽인들의 별장촌이 있으며, 해변도로의 옆으로 정갈하고 편안해 보이는 유럽식 카페가 즐비한 지중해의 여유롭고 현대적인 휴양도시가 되어 있다. ⓒ 뉴스피크

정말 좋은 위치에, 화려하고도 실용적인 항구도시는 학자와 학문, 예술과 문인 그리고 상인과 함께 욕망 그리고 전쟁을 불러들였다. 

이집트 왕들은 이 도시, 이 도서관을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꼭 보고 싶은 명소로 만들었다. 

외교사절들은 전 세계를 돌며 책을 수집하였다. 인도의 대왕에게까지 공식서한이 보내졌고, 이 항구를 들어온 모든 책은 필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때론 막대한 보증금을 내고 유명한 서적들을 빌려 오기도 했으며, 3대 비극시인의 작품 원본을 입수한 후 사본을 만들어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지식과 사람, 문화와 예술이 모여들었다. 기하학원론을 쓴 에우클레이데스Eucleides 유클리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에라스토테네스Eratosthenes 등 당대를 풍미했던, 지금은 우리의 교과서를 풍요롭게 하는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파로스 등대의 잔해 위에 1480년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 세운 카이트베이 요새. 카이트베이 요새 또한 19세기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가 이집트 고대 유물 위원회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 이 요새 안은 사원과 이집트 해군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 뉴스피크
파로스 등대의 잔해 위에 1480년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 세운 카이트베이 요새. 카이트베이 요새 또한 19세기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가 이집트 고대 유물 위원회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 이 요새 안은 사원과 이집트 해군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 뉴스피크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파라오의 집착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집착은 인류의 지식과 그 구현인 책에 관한 것이었다. 온갖 방법, 때로는 편법까지 동원해 온 세상의 지식을 모았고, 그 집합체를 보고 나누기 위해 온갖 지식인과 철학자, 과학자가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 지식 너머의 세상을 꿈꿀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전에 볼 수 없던 풍경이며 지적인 향유는 아직까지 전설로 남아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것이다.  

하지만, 찬란한 도시는 무한한 찬사와 함께 끝없는 질투와 질시를 불러왔다. 그래서 만들기 보다 지키기가 어렵다고들 하지 않던가. 도서관 그리고 도시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VII Thea Philopator BC 69~BC 30. 8. 30를 위한 카이사르Caesar의 전쟁은 그 시작이었다.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기록된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배에 불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적들이 그의 바다를 통한 통신 능력을 막으려하자 자신의 배를 태워버렸다. 이 불길은 부두를 태우고 나서 번지고 번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까지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1961년 한 이집트 잠수부가 높이 7미터의 이시스 조각상을 발견하였다. 그로부터 무수히 많은 이들이 지중해의 푸른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렇게 1994년 이후로 알렉산드리아 해저에서 발굴된 유구만 하더라도 2만여 개가 넘었다. 해안선 아래 고대의 화려한 도시가 잠들어 있으며, 파로스의 등대가 실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 뉴스피크
1961년 한 이집트 잠수부가 높이 7미터의 이시스 조각상을 발견하였다. 그로부터 무수히 많은 이들이 지중해의 푸른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렇게 1994년 이후로 알렉산드리아 해저에서 발굴된 유구만 하더라도 2만여 개가 넘었다. 해안선 아래 고대의 화려한 도시가 잠들어 있으며, 파로스의 등대가 실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 뉴스피크

로마인의 공격과 통치는 종교박해로 이어졌다. 그리고 기독교의 이교도 박해로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기념비적인 건물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기록들이 유실된 시기는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의 반란을 억압하려던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도시를 점령했을 때라고 한다. 전투가 도서관이 위치한 곳에서 일어나 많은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세라페이온 신전의 도서관은 파괴를 면했지만, 콥트 주교 테오도시우스는 391년, 포고령을 내려 로마의 새로운 국교가 된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행위를 이교라 칭하고 불법으로 간주했다. 결국 테오도시우스의 법령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일부였던 세라페이온 마저 파괴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처참한 파괴의 배후인물은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해저에서 올라온 파로스 등대의 유물들 ⓒ 뉴스피크
해저에서 올라온 파로스 등대의 유물들 ⓒ 뉴스피크

그리고 642년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이슬람시대가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당시 이집트 칼리프 오마르의 명령을 받은 아무르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사건에 관해 가장 긴 기록은 아부 알 파라즈로도 알려진 시리아의 기독교 작가 바르 헤브라에우스(1266~1286)가 남겼다. 

당시 이집트를 통치하던 오마르 칼리프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에 대한 처리 여부를 묻는 서한에, “자네가 내게 말해준 책들에 쓰인 것이 신의 책꾸란 Quran에 합당하다면 우리는 그 책들 없이 신의 책만으로도 족할 것이네. 반면, 그 책들에 신의 책과 상반되는 내용이 있다면 그 책들은 사악한 것일 테지. 그러니 그 책들을 모두 파괴하게.”라고 답했다고 한다. 

결국, 그 많은 장서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4,000개의 공중목욕탕에서 장장 6개월 동안 땔감으로 쓰였다고 책의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진실 여부는 근대 이후 많은 반론에 휩싸여 있다. 

오로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의 폭력성에 더해, 종교적이며 편협한 단호함이 인류에게 가장 소중했던 기록들을 회복할 수 없는 파괴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들의 신념이 무섭고, 관용이 아쉽다. 그들은 지식의 생산에 족쇄를 채우고, 소비에 공간을 없애버렸다. 그렇게 인류의 놀라운 자산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게 된 것이다. 

게다가 카이사르 때부터 수없이 파괴되었음에도 이슬람 시대의 이야기만이 선명하게 남아 전해지는 현실이 과거의 비극만큼이나 씁쓸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불에 의해 사라지는 것보다 편협함에 의한 왜곡과 망각에 의해 사라지는 게 더욱 무서운 게 아닐까? 

어쨌든 그 화려했던 흔적은 한바탕의 꿈처럼 가뭇없이 사라졌고, 이집트 원정을 떠나온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곳에 왔을 때는 그저 한적한 어촌이었고, 지금은 단지 현대화된 지중해의 도시가 그곳에 있을 뿐이다. 

바다에서 거대한 신전이 솟아오른 모습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 뉴스피크
바다에서 거대한 신전이 솟아오른 모습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 뉴스피크

잊혔던 신화는 2002년 다시금 웅장한 도서관으로 탄생했다. 거대한 외벽에 전 세계의 문자를 새기고, 마치 물속에 잠겼던 역사가 새롭게 솟아나듯 그렇게 만들어졌다. 

단지 하나의 도서관이 아름답게 다시 만들어졌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문명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몇몇 영웅과 제국의 화려함이 아니라 끊임없는 지식에 대한 탐닉과 집착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양과 형태 그리고 채우고 있는 내용이 다를지라도 고대와 현대의 도서관에 동시에 환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곳이 인간의 순수한 집착과 탐닉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문명 그리고 평화와 탐구에 관한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고대의 도서관을 보면 도서관은 그 출발부터 보관소라는 원초적 기능을 넘어서는 것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도서관이 젊은이들을 양성하고 단련시키는 체육관에 같이 있었고, 로마시대에는 유한계층의 놀이터인 목욕탕에 통합되기도 했다. 도서관은 학문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담의 장소이기도 했으며 문화가 이루어지고 공유되던 권력의 장소였던 것이다. 도서관을 누가 소유하고 이용하는가 하는 질문은 그 시대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 되는 셈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도서관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외관의 거대함은 안으로까지 이어진다. 솟아오른 기둥이 넓디넓은 도서관 내부를 굳건히 받치고 있다. ⓒ 뉴스피크
외관의 거대함은 안으로까지 이어진다. 솟아오른 기둥이 넓디넓은 도서관 내부를 굳건히 받치고 있다. ⓒ 뉴스피크

 

책과 도서관의 미래 

 

사실 개인적으로 도서관을 무척 가깝게 느끼고 사용하는 처지임에도, 도서관이 많아지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집에서 가사노동과 육아에 시달리는 주부들에게 취미와 특기를 물어보면 독서, 책읽기, 도서관 가기를 꼽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들은 책을 사랑하고, 도서관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책을 사지는 않는다. 편리해진 검색시스템을 이용해 아이와 자신에게 필요한 책을 그때그때 빌려서 볼 뿐이다.  그들에게 도서관은 대여해주는 곳이며, 책은 잠시 빌려보는 DVD와 같은 것이 되어 있다. 아니면 많은 사람들에게 취직과 입시를 위한 편한 공공장소가 되어 있다. 

여기서는 지식의 생산과 나눔이 아니라 단지 서비스와 일방적인 소비만 있을 뿐이다. 도서관에서 얻는 책과 그 속의 지식이 공기와 물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공공재나 공공서비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큰 착각은 없다. 책은 지식의 탐구를 통해, 삶과 세계에 대한 집착을 통해 만들어진 저술이다. 그 책이 판매됨으로써 두 가지 효과가 발생한다. 하나는 지식이 공유, 확산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탐구와 집착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도서관 때문에 책을 사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지식에 대한 탐구와 집착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탐구와 그 결과로서 책이 나오는 환경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고, 이는 지적 향유와 나눔이라는 문화와 그 공간으로서의 도서관마저 없애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거라는 예측마저도 가능하게 한다. 

제국의 회랑 같이 광활한 그곳에는 남녀노소가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실로 천 년 만에 부활한 도서관이다. ⓒ 뉴스피크
제국의 회랑 같이 광활한 그곳에는 남녀노소가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실로 천 년 만에 부활한 도서관이다. ⓒ 뉴스피크

어쩌면 우리는 고대인들보다 더 편협한 시야로 도서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환경은 급격히 변하고 있다. 도서관의 역할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문화적 풍경 역시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그 형태와 관계없이) 책에 관한 탐구와 집착 그리고 확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이 명확하다.  편협한 소비와 그로 인한 시스템의 붕괴는 도서관의 파괴와 함께 문명의 상실로 이어짐을 오래된 도서관은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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