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知] 2 전통주의 풍경과 한산 소곡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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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知] 2 전통주의 풍경과 한산 소곡주
  • 윤민 기자
  • 승인 2012.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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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신(酒神)의 나라, 밀주(密酒)를 마시다

한밤중, 집안 아낙네들이 분주해졌다. 남정네들은 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는 술독을 숨기느라 여념이 없다. 이내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칠게 들리고 미처 감추지 못한 술독은 마당 구석에서 깨지고 익다만 술은 땅 속으로 스며든다.

▲ 술이 끓기 시작한다. 누룩은 부글부글 올라오면서 묘한 향을 풍기기 시작한다. 이 독특한 과정과 표현에서 우리는 선조의 지혜를 엿본다. ⓒ 뉴스피크
집안의 맏며느리들은 수대를 이어 내려온 가양주 제조의 맥을 끊을 수 없어 밀주를 만들었고 단속이 나올 때마다 집안은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세법 등 갖가지 규제로 집에서 술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던 시절,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1916년에 가양주 허가를 받은 곳은 289,356개소였다. 그러나 우리 술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정책으로 해마다 그 수가 줄어 1933년에는 급기야 단 한곳만 남았고, 이마저도 이듬해 허가가 취소되어 법적으로 가양주를 만들 수 있는 곳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주세법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통주는 전국으로 이름난 수만 해도 360여 가지에 달했고, 문헌상에는 800여종의 전통주가 있을만큼 우리 술은 다양하고 풍부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에 불과할 뿐이다. 그 술의 종류가 청주이든, 탁주나 소주이든 간에 술을 만들 수 있는 형편이 되는 가정에서는 각자 술을 빚어 마셨고, 그 맛은 빚는 이에 따라 조금씩 달랐기에 그 수를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하다.
술을 빚기 시작한 것도 그 시작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만큼 먼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위지 동이전으로 “부여, 진한, 마한, 고구려의 무천, 영고, 동맹등 제천행사에서 ‘주야음주가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우리의 오래된 풍경에는 다양한 발효음식의 용기와 과학이 숨어 있다. 만나기 쉽지 않았던 전통주 역시 우리의 풍경 중 하나였다. ⓒ 뉴스피크
고구려는 발효의 나라라 할 만큼 술 빚기와 장 담그기 기술이 발달했는데, 이미 이때에 술누룩 주국(酒鞠)과 穀芽(곡아)로 술을 빚는 방법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AD 430년경 북위의 산동태수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에는 ‘여름철 황혼녘에 빚어 다음날 새벽에 먹는 하계명주(夏鷄鳴酒)’에 대한 고구려 술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주조기술은 중국으로 건너가 곡아주(曲阿酒)라는 명주를 잉태하고, 고구려의 양조 기술을 이어받은 낙랑주법이 신라사회에 뿌리를 내려 신라주가 당대의 운사들에게 애용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서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김부식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에 완성한 삼국사기(三國史記)로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고구려의 제3대 왕, 4년~44년, 재위 : 18년~44년) 편에는 ‘지주(旨酒)를 빚어 마시고 그 힘으로 한의 요통태수를 물리쳤다’고 적혀있다. 이는 당시 전투를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술을 하사하여 사기를 높이거나, 나라의 큰 행사 때 술을 나눠마셨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의 고사기(古史記)에 보면 응신천황(應神天皇, AD27~312)때 백제의 인번(仁番)이란 사람이 새로운 방법으로 미주(美酒)를 빚었기 때문에 그를 주신(酒神)으로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 술의 역사는 불과 몇 십 년의 일제강점기 동안 사라지고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온 청주는 어느새 일본 술의 대명사가 되었고,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기 위해 빚었던 가양주는 밀주의 운명으로 힘든 세월을 견디며 오늘에 이르렀다. 밀주로나마 전통주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종가를 찾아온 일가친척에게 술 한 잔 대접하려던 종갓집 며느리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어렵게 명맥을 유지하던 전통주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할 무렵,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우리 것’을 찾는 과정에서였다. 이때 문화재관리국은 ‘향토민속주 부활정책’에 따라 우리나라 전통민속주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 경주교동법주, 문배주, 면천두견주를 중요무형문화재 86호 ‘향토술담그기’로 지정했고, 이들은 ‘3대 국주(國酒)’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에 전통주에 대한 규제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면서 현재 허가를 받아 제조되고 있는 전통주는 150여종에 이르며 경기도의 계명주(鷄鳴酒, 엿탁주), 충남의 한산소곡주(韓山素穀酒), 대구의 하향주(荷香酒) 등 20여종의 전통주가 시도무형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

▲ 어린이가 우리의 전통주 풍경을 그려냈다. 색과 풍경이 예쁘고도 따스하다. ⓒ 뉴스피크

 

하나이면서 다른 이름

청주, 법주, 소주, 약주, 단양주…. 오랜 역사만큼 많은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 술이다.
전통주의 가장 큰 분류는 술을 거르는 방법, 제조법에 따르는 것으로 탁주, 청주, 소주로 나뉜다. 막걸리로 대표되는 탁주는 술을 빚고 걸러서 바로 마시는 술이고 청주는 술을 거른 뒤 익혀서 먹는 술, 소주는 탁주나 청주를 증류시켜 만든 술로 대체로 청주를 증류한다.
또 술을 빚는 횟수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기도 하는데, 밑술과 덧술을 섞어 한번 빚는 술을 단양주(單釀酒), 밑술로 한번 발효시킨 것에 덧술을 하여 다시 숙성시키는 것을 이양주(二釀酒)다. 밑술 발효 뒤에 덧술을 두 번 해 세 번 빚는 술은 삼양주(三釀酒)라 한다. 삼양주는 술의 빛깔이 맑고 황금색을 띄며 부드럽고 순한 ‘깊은 맛’, ‘맛있는 향기’가 나는 고급 전통주다.
보통 탁주가 단양주에 속하며, 대부분의 청주는 이양주 방식으로 빚는다. 그리고 삼양주에는 전라남도의 호산춘(湖山春), 전라남도 남원과 서울의 삼해주(三亥酒) 등이 있으며, ‘새해에 오일(午日)마다 네 번을 빚어서 봄을 지내며 익힌 술’이라는 사마주(四馬酒)가 사양주(四釀酒)에 속한다.
또한 그 효능이나 술의 맛과 향기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는데 꽃이나 향기를 첨가한 가향주(加香酒), 탁주나 청주에 소주를 섞은 혼양주(混養酒), 증류주인 소주에 과실이나 향초 등의 추출물을 섞은 혼성주(混成酒) 등이 있다.
그리고 약주(藥酒) 도 효능에 따라 술을 구분하는 하나의 범주인데, 이는 약재를 넣어 빚은 술이 아니라 어떤 술이든 ‘약이 되기 위해 먹는 술’을 통칭한다. 조선시대 성종(成宗, 1469~1494년 재위)은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했는데, ‘병을 가진 자가 약으로 먹는 술’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한다.
이밖에도 전통주는 제조시기, 밑술의 재료, 효능 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하나의 술이라도 여러 가지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충청남도의 면천 두견주(沔川 杜鵑酒)는 청주이면서도 두견화 꽃잎을 넣어 만든 ‘가향주’인 동시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만든 ‘약주’이자 두 번 발효시킨 ‘이양주’가 되는 것이다.

▲ 한산 소곡주는 가장 유명하고도 대중적인 전통주 중의 하나가 되었다. ⓒ 뉴스피크
앉은뱅이 술, 한산 소곡주

조선시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가 한산지방의 한 주막에 들렀다. 선비는 미나리부침을 안주로 소곡주 한잔을 마셨는데 그 맛이 너무 좋았다. 결국 선비는 취흥이 돋아 시를 읊으며 술을 즐기느라 과거를 치르지 못했다.
물건을 훔치러 들어왔던 도둑이 술맛에 취해 도망가지 못했다가 잡혔다는 일화도 있다.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도무지 술잔을 놓을 수 없는 술. 그래서 ‘소곡주(素穀酒)’는 본래의 이름보다 ‘앉은뱅이 술’로 더 유명하다.
술맛만큼 소곡주의 역사 또한 깊어, 15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안왕(多晏王) 11년(318년)에 흉작으로 민간에서 제조하는 소곡주를 전면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 사서인 고사기응신천황조 편에도 “베 짜는 기술자인 궁월군의 증손인 수수거리(仁番, 인번)가 일본에 가서 술을 빚어 응신천황에게 선물하니 왕이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과 “후세에 그를 주신(酒神)으로 섬겼다”는 기록이 에 남아있다.
이 같은 사실로 인해 소곡주가 일본 술의 모태가 되는 술로 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 수수거리가 빚은 술이 소곡주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상당수 학자들은 시기와 주조방법 등을 근거로 비슷한 술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왕실에서 즐겼던 술이었던 소곡주는 백제 멸망과 함께 잠시 맥이 끊겼다가 백제 유민들이 충남 서천군 한산지역에 군락을 이루면서 다시 빚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주세령, 양곡법 등 전통주에 대한 각종 규제와 양조금지 정책으로 인해 오랜 시간을 밀주의 운명으로 살아왔다.
소곡주가 다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1979년 김영신 할머니가 충남 무형문화제로 지정되면서였다. 그리고 대를 이어 그의 며느리인 우희열 씨에게 전수되다 지금은 우희열 씨의 아들인 나장연 씨가 ‘한산소곡주’라는 이름의 술도가를 운영하고 있다.

▲ 한산 소곡주의 나장연 사장. ⓒ 뉴스피크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산면에서 정부의 허가를 받은 소곡주는 나장연 씨의 술도가에서 나오는 소곡주가 유일했다. 하지만 2009년 10월, 한산면 일원이 전통주 생산지로는 처음으로 산업특구로 지정되고 주류 제조면허가 간소화되면서 밀주 신세였던 술도가들도 양지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 술을 빚어 아는 사람들에게만 판매되던 다양한 맛의 소곡주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현재 한산면에서는 소곡주를 대중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한산 소곡주 제조법 표준화, 고급화와 품질 균일화나 대량생산을 위한 담금 시설과 위행시설 등 현대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양주 공동제조시설, 소곡주테마거리 조성과 역사홍보관 건립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2013년까지 총 157억 원이 들어가는 이 사업이 마무리되면 한산의 명물 소곡주는 한층 우리와 가까운 곳에 서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 한산에는 다양한 전통주의 풍경이 있다. 집에서 고집스럽게 밑술을 만들어 내오는 곳도 있고, 현대화된 기술을 과감히 도입한 곳도 있다. ⓒ 뉴스피크
한산면 신현리에 들어서면 가게 곳곳에 ‘한산 소곡주’를 파는 광고가 적혀있어 소곡주의 본고장다운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이곳에는 나장연 씨의 ‘한산 소곡주’ 외에도 크고 작은 술도가의 소곡주가 함께 팔리고 있다.
똑같은 품질과 같은 양으로 김치를 담궈도 담구는 사람의 손맛에 따라 김치 맛이 달라진다고 한다. 소곡주 역시 마찬가지다. 비슷한 재료, 비슷한 제조방법으로 술을 담그지만 쌀과 누룩의 배합량, 발효과정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술맛이 달라져 집집마다 내놓는 소곡주의 맛이 다르다. 또한 술을 대하는 사람의 취향도 제 각각이어서 이집의 술이 어떤 이에는 형편없는 술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자신에게 잘 맞는 술일 수 있고 이것이 가양주의 매력일 것이다.
소곡주는 100일이 지나야 제 맛을 내는데 음력으로 10월에 술을 내려 이듬해 1월까지 익힌 술을 으뜸으로 친다. 소곡주에는 쌀과 찹쌀, 누룩 외에 가을볕에 잘 말린 들국화와 메주콩, 생강 등이 맛과 향을 내는 재료로 들어간다. 잘 빚어진 소곡주는 연한 미색을 띄고 있으며, 들국화의 은은한 향이 풍긴다. 술맛은 진하고 복잡하다. 달면서도 새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끈적한 느낌으로 곡주 특유의 감칠맛을 낸다.
좋은 술을 좋은 곳에서 마신다면 그 또한 운치 있는 일, 신현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그럴 만한 곳이 있다. 금강 유역의 6만여 평에 이르는 신성리 갈대숲이 제격이다. 영화 ‘JSA공동경비구역’의 촬영지가 됐을 정도로 빼곡하고 넓게 펼쳐진 갈대밭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금강의 맑은 물을 차고 오르는 철새의 운무는 우리를 한 폭의 산수화로 이끈다.
사라락거리는 갈대의 노래에 술 한 잔 기울이고, 맑은 강에 전하는 바람에 또 한 잔 걸친다. 자연의 정취에 담뿍 안겨 자연의 조화로 빚은 소곡주 한 잔 기울이면 천년의 세월을 넘어 풍류가객이 된다. 알싸한 기분 떨치려 느린 걸음으로 갈대 사이를 걷다 보니 시 한 수 절로 떠오른다.

잔 들고 혼자 앉아 먼 뫼를 바라보니
그리운 님이 오다 반가움이 이러하랴
산은 말씀도 웃음도 없어도 못내 좋아 하노라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 작가)

글 사진 한동엽 정리 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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