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知] 2 경주의 전통, 교동의 맛, 경주교동법주
상태바
[여행 知] 2 경주의 전통, 교동의 맛, 경주교동법주
  • 윤민 기자
  • 승인 2012.04.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경주교동법주 안채. 볕이 따뜻하다. ⓒ 뉴스피크

거리는 꽃으로 물들어 있다.
벚꽃이 하늘거리며 도로에 떨어지면 마음은 두근거리고, 가슴은 진한 몽롱함을 찾는다. 그리고 시원한 풍경과 과하지 않는 얼큰함을 갖춘 전통주는 이때 가장 어울리는 것이다.

가까이에는 한산 소곡주가 있고, 조금 멀리는 신라의 꿈이 서린 경주의 법주가 있다. 그중 경주교동법주는 따뜻한 봄햇살 아래에서 유채꽃의 화려함과 함께 즐기기에 더없이 포근한 술이라 하겠다.
이제 그 시간이 새겨진 우리의 술을 찾아 떠나보자.

▲ 경주 포석정. 그때는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풍류로 기억되는 곳이다. ⓒ 뉴스피크
경주 최 부잣집 술, 교동 법주

경주 남산 포석정에 물길 위로 따스한 술이 담긴 잔이 한가로이 흐른다. 술잔을 받아 든 신하는 맑은 술에 목을 축이고 그윽한 시 한수 읊는다.

화롯불을 헤치고
술을 따끈히 데워놓았네.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이 밤,
와서 한잔 안 하려는가
- 백거이(白居易 Bo Juyi, 772~846, 중국 중당시대의 시인.)의 ‘벗에게’

신라시대 연회 장소였던 포석정은 왕이 술을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별궁의 하나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별궁은 없어지고 마른 전복(포어:鮑魚) 모양의 석구만 남아있는데 물길은 22미터, 높낮이의 차는 5.9센티미터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로 물길의 오묘하게 흘렀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술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353년 중국의 명필 왕희지가 쓴 난정서문(蘭亭敍文)에 보면 ‘맑은 시냇물을 아홉 구비로 돌아 흐르게 하여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게 하되 술잔이 아홉 구비를 다 지날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세잔을 마시게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 따서 만든 것이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은 물론 일본에도 있었지만, 현재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뿐이다.
포석정의 주로(酒路)는 풍류와 기상을 싣고 경주를 대표하는 술, 경주교동법주가 있는 ‘최 부잣집’으로 흐른다.

▲ 요석궁 간판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공터가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높이 솟은 대문이 찾는 이들을 반긴다. 경주 최부잣집이다. ⓒ 뉴스피크

만석지기로 알려져 최 부잣집으로 불리는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던 궁터에 터를 두고 있다. 걸어서 20여분 거리에 곳에 천마총이 있어 관광객의 왕래가 많다. 고택으로 들어서는 골목 오른쪽에는 ‘요석궁’이라는 한정식집이 있는데 이곳은 일제시대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은신처가 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며, 지금은 최 부잣집의 전통 가정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각계 유명 인사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요석궁을 지나면 ‘독립유공자 최준 선생 생가’라는 안내판이 있는 기와집 한 채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최씨 고택이다. 경주에 변변한 호텔이 없던 시절, 이곳은 정부의 고위관료나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영빈관의 역할을 했을 정도로 전통과 멋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시대의 역대 통감, 미국 초대 대사는 물론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도 신혼여행 중에 최 부잣집에 들러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 고택이 건립된 것은 1700년경으로 처음에는 7000평 규모의 후원을 갖춘 89칸 규모의 집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와 화재 등으로 50여 칸으로 줄어들었고 후원도 사라졌지만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최 부잣집의 솟을 대문에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것이 주인이 기거했던 큰 사랑채로 1970년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2006년에 복원된 것이다. 사랑채 오른편에는 커다란 곡간이 있는데 천석의 쌀이라도 쌓아 둘 만큼 넉넉한 규모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부인과 며느리, 딸들의 거처였던 안채가 있는데 마당 한가운데의 항아리단을 중심으로 ‘ㄷ’자형 모양을 하고 있다. 안채는 일제시대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을 뿐 200년 전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고택 왼쪽에는 ‘경주교동법주’라고 적힌 갈색 간판이 나오는데 이곳이 현재 최 씨 일가의 거처이자 교동법주가 만들어지는 곳이다.

▲ 최부잣집 옆에는 교동법주를 판매하는 안채가 붙어 있다. 그곳의 마루에는 옛 중요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던 할머니가 따뜻한 볕과 찾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 뉴스피크
경주교동법주는 경주 최 씨 집안의 선조인 최국선이 조선조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하는 사옹원 참봉을 지내다 낙향하여 빚기 시작한 궁중 술로, 최 씨 집안의 맏며느리들을 통해 350년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법주’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전통주는 경주교동법주가 유일하다.

경주교동법주는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등재되면서 최 씨 가문의 며느리인 배영신 씨가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제조비법을 전승하여 왔으며, 2006년에는 그의 아들인 최경 씨가 어머니의 대를 이어 인간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주교동법주는 분류상 ‘몸에 이로운’ 약주에 속하며, 찹쌀로 빚은 ‘맑은 술’ 청주의 하나다. 청주는 예로부터 ‘겨울 술’이라 하여 여름에는 술을 빚지 않았는데 교동법주 역시 추수가 끝난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만 술을 빚는다.

경주교동법주는 크게 세 가지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데 그 첫 번째가 누룩 빚기다. 누룩이 잘 떠야 좋은 법주를 만들 수 있기에 특히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다.

그 다음 과정이 밑술 담금과 덧술 담금으로 2번의 발효과정을 거친다. 첫 번째 발효는 밑술 발효로 잘 빻은 누룩과 찹쌀 죽을 섞어 발효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밑술이다. 밑술의 발효가 끝나면 찹쌀로 지은 고두밥과 밑술, 물을 섞어 고두밥이 엉키지 않도록 골고루 치대는 덧술 담금을 한다. 이때 들어가는 물은 최 씨 집안 마당에 있는 200년이 넘은 우물의 물을 쓰는데 물의 양과 온도가 사계절 내내 일정하고, 물맛이 좋기로 이름 나 있다.

덧술 담금이 끝나면 술독에 옮겨 다시 발효 과정을 거치는데 보통 10일 정도가 지나면 모든 발효 과정이 끝나게 된다. 이때 덧술이 아래로 가라앉고 맑고 투명한 교동법주의 원액이 나오는데 수대를 이어온 장인이 느끼는 색과 맛, 향에 따라 여과시기를 결정한다.

여과된 술은 다시 술독으로 옮겨져 숙성과정을 거친다. 밑술 담금에서부터 숙성이 완료될 때까지는 대략 100일 가량이 걸린다. 완전히 숙성된 교동법주는 맑고 투명한 미황색을 띄며 곡주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풍긴다. 또 신맛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달짝지근한 맛이 여운으로 남고, 강한 듯 하면서도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 넓지 않은 교통은 지금 한참 공사중이기는 하다. 하지만 교동법주 주변에는 전통 고추장을 파는 집도, 그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골목을 아직도 만날 수 있다. ⓒ 뉴스피크
1년의 절반만 술을 빚는데다 제조 과정 하나하나를 사람의 손을 거치는 전통방식을 고수하다 보니 하루 생산량이 채 30병이 안 된다.

가양주로 계승되어오던 경주교동법주가 정식으로 판매 허가를 받은 것은 1991년에 이르러서고 소비자들은 이듬해인 1992년 5월에야 교동법주를 접할 수 있었다. 교동법주의 원래 이름은 ‘경주법주’였으나 제조 허가를 받기 전에 이미 ‘경주법주’가 모 소주회사의 상표로 등록되는 바람에 이곳의 이름을 따서 ‘경주교동법주’로 허가를 받아 오늘에 이른다.

궁중의 술 법주

법주(法酒)는 ‘맑은 술’을 통칭하는 청주(淸酒)의 하나다. 법주를 청주와 구분하는 것은 궁궐 내에서 빚은 좋은 술을 법주라 불렀기 때문이다. 조선 태조 4년에 금주령을 내리자는 헌사(憲司)의 상소문에는 법주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손님을 대접하는 집을 보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치만 서로 숭상하여, 여러 날 동안 준비하고, 술이 궐내에서 쓰는 법주(法酒)가 아니고 과자(菓子)가 진기(珍奇)한 것이 아니며, 기명(器皿)이 상에 가득차지 않으면 손님을 청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어찌 재물만 허비할 뿐이겠습니까?”

▲ 경주 최부잣집의 내부. 넓고 정갈하다. ⓒ 뉴스피크
경주 최부잣집

경주 최씨의 종가로 신라시대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교동을 찾는 것은 의외로 쉽지만, 또 마땅한 표지판이 없어 잠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일단 계림의 끝 쪽에 경주향교가 있고, 향교 담을 끼고 난 골목길로 접어들면 교동이 나온다. 그 교동의 앞길에 커다랗게 자리한 음식점 요석궁 간판을 찾으면 그 사이 골목길로 최씨 고택이 바로 보인다.

9대째 대대로 살고 있으며 1700년경 이 가옥을 지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건물 구성은 사랑채·안채·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대문채에는 작은 방과 큰 곳간을 마련하였다.

사랑채는 안마당 맞은편에 있었으나 별당과 함께 1970년 11월 화재로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사랑채터 뒷쪽에 있는 안채는 트인 'ㅁ'자형이나 실제로는 몸채가 'ㄷ'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고 'ㄱ'자형 사랑채와 '一'자형 중문채가 어울려 있었다.

또한 안채의 서북쪽으로 별도로 마련한 가묘(家廟)가 있는데 남쪽으로 난 반듯한 길이 인상적이다.
안채 뒷편으로 꽃밭이 있어 집 구성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대체로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최식씨가옥(慶州崔植氏家屋)이었으나, 경주 최씨가문이 대대로 살아왔던 집이고, 경주의 이름난 부호로 '교동 최부자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경주교동 최씨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 하였다. 

▲ 경주교동법주. 전통주의 익숙한 맛이 조금 고급스럽게 다가온다. 냉장보관이라서 가져오기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하루 정도는 힘든 여행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 뉴스피크

글 사진 한동엽 정리 윤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