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知1] 민속주 1호, 금정산성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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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知1] 민속주 1호, 금정산성 막걸리
  • 윤민 기자
  • 승인 2012.0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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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찾아 술잔 안으로 여행을 떠난다 1

▲ ⓒ 뉴스피크

“주인장, 여기 막걸리 한말 주소.”
양조장 안으로 말 통을 든 촌로가 들어선다. 밭일을 하다 새참 때가 돼서 일꾼들과 나눠먹을 막걸리를 받으러 온 것이다. 양조장 직원은 통을 씻어 한쪽에 놔두고 커다란 냉장고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통을 꺼내준다. 냉장고의 찬이슬이 앉은 술통을 본 촌로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술통을 자전거에 단단히 묶고는 일꾼들에게 되돌아간다.

▲ 자연과 물이 좋아야 좋은 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금정산성 막걸리가 만들어지는 곳은 마음과 몸이 아늑해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 뉴스피크

우리는 일과 놀이가 함께했던 민족이고, 그런만큼 생활에서 술은 빠질 수가 없었다. 그런 향기로운 전통은 일본이 우리 땅에 활개를 치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주세령이 발표된 이후 막걸리를 만들 수 있는 곳은 양조장으로 한정되었다.

게다가 일제시대부터 이어온 각종 규제와 국세청의 양조장 통폐합 정책이 한 몫 해 1916년에 122,180개였던 양조장이 2007년에는 1,425개로 줄어들었다. 밀주로 명맥을 유지한 곳도 있으나, 정식으로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사실상 양조장 운영이 불가능했다. 
 

▲ 자연과 물만큼 술에 중요한 것은 사람의 정성일 것이다. 꼼꼼하고, 부지런한 손길은 민속주 1호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 뉴스피크

그러니 전통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양조장과 술은 그 안에 끈끈한 사연이 없을 수 없다.
그중 부산의 명물 금정산성 막걸리는 300년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것은 1979년에 이르러서다. 금정산성 막걸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후인 1703년도에 해상을 방어할 목적으로 금정산성 축성할 당시 화전민들이 생계수단으로 막걸리를 빚어 인부와 군졸들에게 새참용 술로 제공하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7킬로미터에 달하는 석조 성벽을 쌓기 위해 동원된 군졸과 인부들은 산성막걸리를 마시며 갈증과 허기를 덜었다. 일과 놀이가 하나된 우리의 전통에 항상 함께했던 것이 바로 막걸리임을 금정산성막걸리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 금정산성 막걸리는 누룩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막걸리에 비해 진한 맛과 향을 자랑한다. ⓒ 뉴스피크

당시 금정산성의 수비를 담당한 해월사와 국청사의 승려들이 부업으로 만들기 시작한 산성누룩이 마을 사람들에게 전래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좋은 누룩으로 좋은 술을 빚을 수 있었다. 이때만 해도 양조장은 없었고 개인이 집에서 술을 만드는 식이었으나, 1929년 주세법이 바뀌면서 3개 부락의 6개 공장이 허가를 받아 1934년까지 막걸리를 만들어 팔았다. 그 후 주세법이 강화되면서 밀주로 전락한 것이다.
금정산성 막걸리가 밀주로나마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산속 깊은 곳에 있는 금정산성마을의 입지조건 때문이었다. 해발 400미터의 절구형 분지에 있는 마을은 산 몇 개를 넘어 ‘이런 곳에 마을이 있다니’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다. 도로가 놓인 지금도 10여분 정도 산길을 달려야 ‘금정산성 먹거리촌’이라고 쓰인 마을 입구에 도착할 수 있을 만큼 깊은 곳에 있다. 덕분에 다른 곳과 비교해 밀주를 단속하던 관리들도 이곳만큼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금정산성 막걸리가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순시차 부산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59년도에 부산에서 군수사령관을 지내며 마셨던 막걸리를 찾았다. 하지만 쌀 자급자족 시책 때문에 쌀로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되던 시절이라 금정산성막걸리를 마시지 못하고 부산을 떠났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 금정산성 막걸리를 민속주 1호로 지정했고, 이듬해 마을사람들이 의기투합해 현재의 양조장을 세우고 정식 허가를 받았다. 새삼 잘한 일도 있구나 싶다.

▲ 고추 하나와 김치 그리고 막걸리 한 잔이면 세상이 행복해진다. 길손에게 이보다 큰 만찬은 없다. ⓒ 뉴스피크

‘민속주 1호’가 된 금정산성 막걸리는 곳곳의 관심을 받으며 막걸리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작 산성마을 사람들은 ‘1호’라는 의미보다는 쌀과 누룩, 물만을 사용해 술을 빚는 ‘유일한 전통 방식의 막걸리’라는 자부심이 더 대단했다.
대부분의 양조장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온 일본식 주조법인 ‘입국식’으로 술을 빚는데, 이것은 누룩 대신 일본식 누룩인 ‘입국(粒麴,코지/koji)’을 사용하는 것으로 인공 효모를 뿌리는 방법이다. 
전통방식으로 빚는 산성막걸리는 잘 찐 고두밥에 15~20일 가량 발효된 누룩을 빻아 섞는다. 이것을 물과 섞어 20℃에서 발효시킨다. 발효가 진행되고 있는 술통은 “두두두두”하는 소리를 내며 거품을 터뜨리기도 하고, 시큼한 가스를 내뿜으며 사람의 접근을 막기도 한다.
보통 여름에는 일주일, 겨울에는 10일 정도 발효된 술은 알코올 도수가 18% 정도 되기 때문에 물과 섞어 도수를 낮추는 과정을 거친 후 출시하게 된다.
금정산성 막걸리가 대통령의 입맛을 사로잡은 비결은 60년이 넘은 누룩방에서 만드는 누룩에 있다. 이곳의 누룩은 다른 곳과 다르게 얇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을 48~50℃에서 보름정도 자연 발효시키면 누룩 안에서 좋은 술을 만들어주는 세 가지의 누룩곰팡이가 생겨 술맛을 깊게 만든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하루 생산량은 5000병 정도에 불과하다. 하나하나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는 누룩 생산량의 한계 때문이다. 유명세만큼이나 주문량도 쏟아지지만 그것을 맞추기 위해서는 기계화 설비를 갖추어야한다.

▲ 화려진 않지만 진한 맛을 내는 금정산성막걸리가 태어난 곳이다. ⓒ 뉴스피크

하지만 현재 금정산성 막걸리를 이끌고 있는 유청길 사장은 그럴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이제 한국에서 전통 방식으로 막걸리를 만드는 곳은 우리 하나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마저 안 하면 전통이 다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그의 확고한 의지 때문이다.

▲ 금정산성 주변은 이미 맛으로 가득찬 곳이 되어 있다. ⓒ 뉴스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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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에는 흑염소와 같은 다양한 먹거리와 금정산성과 범어사와 같은 다채로운 볼거리가 있다. 특히 10월에는 96년부터 이어져온 금정예술제가 열리고, 2011년에는 제1회 금정산성막걸리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글 한동엽, 윤민 사진 한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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