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사문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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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사문난적
  • 범상스님(6.15경기본부 홍보위원) 기자
  • 승인 201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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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범상스님(6.15경기본부 홍보위원)
▲ 범상스님(6.15경기본부 홍보위원). ⓒ 뉴스피크

[뉴스피크]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은 인간의 위대한 상상력과 창의성에 한계가 없음을 증명하였다.

새를 보고 어떤 사람은 하늘을 나는 상상력을 키웠고 여기에 창의성을 보태어 비행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하늘나라에 인간의 일들을 전해주는 전령으로 생각하여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탄생시켰다.

상상은 비행기로 실상이 되었고, 심성에 변화를 주는 문학작품 역시 실상이 되었으며, 마음의 외화(外化)라는 측면에서 일체유심조이다.

일체유심조를 한발 짝 더 들여다보면 “세상은 내(인간)가 본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로 해설된다. 즉, 신물질(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은 이때까지 알고 보아온 것과는 다른 무엇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같은 사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같은 원인이 전혀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하며, 그 결과가 또 새로운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인류는 놀라운 변화를 거듭해오고 있다.

오늘날의 과학문명을 비롯해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은 형상 없는 마음작용 즉, 일체유심조의 산물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산업을 선도하는 구글은 마음(일체유심조)의 원리를 가장 잘 아는 기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구글의 아이디어 회의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모두의 동의’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최선의 아이디어란 모든 선택의 방향을 놓고서 공개적으로 깎아내는 과정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란다.

이것은 상관의 지시가 떨어지기 바쁘게 자기 생각은 온 간곳없고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방법 찾기기에 급급 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처럼 우리가 익혀온 회의는 상의하달의 지시를 받는 자리로서 처음부터 다양성이 배제된 기형적이고 허약한 계획임을 알 수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일방적인 상의하달은 (자기)‘생각 없는 사람’을 양산하여 불통과 획일적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알면서도 왜 우리는 ‘만장일치의 박수를 미덕’으로 알고 상반되는 견해를 적(敵)으로 치부할까?

조선이 건국되는 14세기 서구는 문예부흥을 맞이한다. 다시 말하면 서구에서 유일신을 기반으로 했던 획일적 사회가 막이 내릴 때, 조선은 성리학 외에 다른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적(政敵)에 가하는 폭력을 ‘이단’과 ‘사이비’로 몰아 정당화하는 사문난적이라는 명분은 건국에서부터 사회전반에 억압과 폭력을 가하며 500년을 지속했다.

폭주하던 기관차가 당장 멈출 수 없다. 우리는 아직도 과거 사문난적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창조경제를 주창하고 있고 있는 박근혜정부역시 사문난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창조와 창의성에 근본이 되는 자유로운 토론과 견해를 활성화 시켜야 한다. 그리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에 대해서도 구글의 회의가 보여주는 다양한 견해를 수용하여 최선의 방안을 마련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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